이명박 대통령이 개각이라는 승부수를 던졌다. 결과적으로 고심에 고심을 더한 흔적이 보이는 작업이었음에 분명하다. 더불어 정치권은 정체성 혼란에 빠졌다. 바로 정운찬 총리 지명이다. 평소 현 정권의 정책에 비판적이던 정운찬 서울대 교수를 총리로 지명한 사실 자체는 이명박 대통령의 '친서민정책'과 '개혁적 이미지'로의 방향 전환의 상징적 결과물이다. 말로만 '친서민'이 아니라 진정한 '케인지언'을 정권의 2인자로 영입함으로써 실천의지를 가지고 있음을 국민들에게 알린 것이다.
딴지걸기 좋아하는 세인들은 이에 '꽃놀이패'라는 저급한 용어를 사용하기도 했다. 차기 대선후보 경쟁에서 박근혜 의원을 견제할 대항마로서의 위상과, 30% 이상의 전통적 보수층 지지율에다, 정운찬 총리가 가지고 있는 20% 가까이의 중도보수 진영의 호감을 더한다면 향후 국정 과제에 추진력이 붙을 것은 뻔한 일이다. 더불어 민주당의 정체성을 완전히 박살낸 것은 부수적 효과라면 효과일 것이다.
과거 민주당 대선후보로까지 거론되었던 그가 한나라당 정권의 총리 제안을 수락했다는 사실은 이른바 진보세력이라 자부하던 '민주당'에 큰 충격을 안겼다. 그렇지 않아도 '중도실용과 친서민정책'이라는 민주당 고유의 이슈를 이명박 대통령에게 선점당한 터에 벌어진 일이었다. 결국 민주당은 자신의 기반이 어디에 있는지를 다시금 돌아보아야할 절박한 상황에 처했다.
용산 참사와 쌍용자동차 사태에 미적지근했던 반응을 보면 진보라고 하기엔 너무 거리가 있었다. 미디어법 개정에만 목숨을 거는 모습에서 국민들은 정권 획득에만 집착하는 얼치기 보수가 아닌가 하는 의심을 낳기도 했다. 두 전직 대통령의 장례 국면에만 매몰되어 현실에 대한 합리적 대안이나 미래에 대한 비전을 전혀 보여주지 못했다. 심지어 두 전직 대통령이 남긴 진보진영 통합이라는 유제에는 '우선순위'라는 이상한 논리로 대응하는 실수를 하기도 했다. '경제적 관점'으로 볼 때 민주당은 전혀 '투자가치가 없는 기업'이나 다름없었다. 따라서 사실상 합리적 보수를 자처하던 정운찬 총리 지명자가 한나라당을 선택한 것은 당연한 것일 뿐, 변절이니 뭐니 하는 논리가 통할 수 있는 게 아니다.
한나라당 역시 혼란스럽기는 마찬가지일 것이다. 특히 처음부터 대선후보군으로 분류되던 정운찬 총리의 합류는 향후 대선후보군에서 절대적 선두를 달리던 박근혜 의원의 입지를 위협할 뿐만 아니라 친박 계열의 발언권, 그리고 친이-친박 계열의 갈등 국면에도 많은 변화를 초래할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이재오 계열이 '개국공신'의 입장이었기에 언제든지 내쳐도 상관없는 카드임에 비해, '영입인사'로서의 정운찬 총리 지명자는 정권 마음대로 주무를 수 있는 상황이 아니다. 즉 처음부터 많은 권한을 부여한 '실세 총리'로서의 자격을 갖춘 셈이다. 정운찬 총리 지명자가 인사청문회가 열리기도 전에 '세종시 사업'과 '4대강 사업', 그리고 향후 총리로서의 소신을 밝힌 장면은 이미 정권과의 사전 조율이 있지 않고서는 쉽게 상상할 수 없는 일이다. 따라서 한나라당 내부의 파워게임 역시 어떤 방향으로 전개될 지 현재로서는 가늠하기 힘든 상황인 셈이다.
이런 혼란을 반영이라도 하듯 많은 사람들은 벌써부터 걱정이 앞서는 모양이다. 과연 대통령과 다른 철학을 가지고 있는 총리와 화합할 수 있을 것인가, 또 강만수 특보와 윤증현 장관이 건재한 현 경제팀과의 조율은 어떻게 될 것인가, 혹은 '케인지언'으로서의 총리 지명자는 과연 자신의 소신을 지켜갈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한 말들이 무성하다. 엄밀히 말해 어떤 상황이든 현 정권과 정운찬 총리에게는 남는 장사다. 정권으로서는 이미지 개선을, 정운찬 총리에게는 본격적인 정치인으로서의 길을 열어준 셈이다. 실상 남은 과제는 남은 사람들의 몫이다. 쓸데없는 딴지 걸기나, 파워게임에만 몰두해서는 국민의 신뢰를 얻을 수 없음을 각 당은 명심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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