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일 관계, 더 나아가 동북아의 공존공영을 언급할 때 반드시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것이 과거사의 진정한 청산이다. 타국을 침략하고, 식민지화한 후 전쟁으로 내몬 역사가 한 세기도 지나지 않은 현재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그 침략자의 진심어린 사죄의 모습이다. 1995년 동북아는 이를 위한 절호의 기회를 맞은 적이 있다. 전 일본 총리 무라야마의 담화는 어쩌면 유럽통합 못지 않은 동북아의 결속을 가져올 수 있는 그런 위력을 지닌 담화였다. 그러나 고이즈미 총리의 집권 후 다시 맞은 일본의 우경화는 이런 기회를 태평양 어디쯤엔가 던져 버렸다.
지난 14일 자민당을 밀어내고 집권한 일본 민주당의 하토야마 총리는 동아시아공동체 구상을 추진할 것을 밝혔다. 이 구상이 주목받는 것은 바로 진정한 화해를 달성하기 위해 선행되어야 할 것이 바로 일본이 아시아 나라의 많은 사람에게 큰 손해와 고통을 준 사실을 직시해야 한다고 밝힌 부분이다. 그의 이러한 인식은 현재 유럽연합의 탄생에는 과거 양차 대전을 치른 당사자들 간의 진정한 과거사 청산이 있었기 때문임을 알고 있음을 보여준다. 용서를 빌고 또 용서를 해야만 진정한 화해와 통합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물론 이러한 인식 변화가 과연 진정한 것인가는 여전히 의문부호로 남는다. 일본은 여러 차례 반성을 했고, 또 이 반성을 뒤집는 망언을 일삼았다. 여전히 독도에 대한 야심을 숨기지 않고 있으며, 조어도 문제로 중국과 충돌하기 일쑤다. 그러나 어찌되었건 일본으로서는 현재와 향후 국제 정세에서 무엇이 가장 필요한지를 곰곰히 생각해 보면 동북아에서의 공존공영은 일본의 생존에 있어서 필수불가결한 존재일 수밖에 없다. 중국의 거대화는 일본의 선택지를 한정하고 있다. 향후 2국 체제가 가동된다면, 그 중심은 바로 미국과 중국임을 부정할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특히 세계의 공장이라 할 수 있는 아시아에서 중국의 영향력은 미국이 견제하기조차 버겁다. 중국과 러시아, 미국의 관계 개선으로 탈냉전의 상태에 접어든 지금에 있어서, 미국 중심의 외교 정책을 고수하기에는 일본의 위험부담이 너무나 큰 것이다.
어쩌면 이러한 현실적 인식이 이번 하토야마 총리의 동북아 공동체론의 진정한 배경일 수도 있겠다. 탈미국중심외교와 동북아 중심의 화해협력 강화는 일본에게 남겨진 유일한 선택지인 셈이다. 오바마 미국 대통령의 이번 아시아 순방도 어쩌면 이러한 대격변기에 맞서는 미국의 필사적인 노력의 일환일 것이다.
대한민국 역시 이런 격변기의 중심에 서 있다. 어떤 선택과 전략을 실행해나가느냐에 따라 향후에 있을 동북아의 저울추는 이리저리 기울 것이다. 중일 간의 주도권 다툼은 이미 예고되어 있다. 동시에 미국은 아시아에서의 영향력을 유지하고 중국을 견제하기 위해 우리의 다양한 지원을 끊임없이 요구할 것이다. 러시아의 풍부한 천연 자원은 우리가 쉽사리 포기할 수 없는 매력적인 선물이다. 마찬가지로 미일중러 모두에게 있어 한반도는 놓칠 수 없는 매력적인 동반자이다. 그렇기에 지금부터 벌어질 외교전은 한반도의 운명을 가를 중대한 사건임에 틀림없다.
이런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신뢰와 행동이다. 그 어떤 국가 수반들의 화려한 수식어와 언사들도 실천 없이는 아무런 가치를 가질 수 없다. 전통적인 맹방이란 단어는 죽어버린 단어가 되었다. 하토야마 총리의 과거사 청산의 의지는 말로만 그쳐서는 안된다. 반드시 가시적인 행동이 뒤따르지 않는다면 일고의 가치도 없는 언설이 되어 버린다. 일본은 이제 독도 문제와 재일한국인, 위안부 문제에 대한 명확한 행동을 보여야 할 때임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전 유럽 한인대표신문 유로저널, eknews.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