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독 간호사가 이곳 독일에 온지도 벌써 40년의 세월이 흘렀다.
꽃망울이 예쁘게 피려고 할 때 희망과 용기를 품고 배움의 굶주림에, 풍요로운 미래를 위해, 부모 형제들을 도와주거나 또 본인의 삶의 질을 향상시키고, 새로운 삶을 개척하기 위해 머나먼 독일 땅을 밟았다.
문화, 언어 심지어 생활 습관이 달라서 적응하기가 힘들었던 시절, 그 당시엔 우선 언어가 가장 큰 문제였다. 환자를 간호하려면 우선 환자들과 의사 소통이 가능해야 했다. 병원 측에서는 단순히 오리엔테이션 정도로 독일어 수업을 제공해주긴 했었지만, 수업에서 배운 독일어로 환자들과 의사 소통을 하기는 어림도 없었다.
그래서 대부분의 간호사들은 독일의 폭스호흐 슐레라고 하는 독일 시민 대학을 다니거나 개인 지도를 받아 독일어를 열심히 배웠다. 일하러 갈 때에는 독일어 사전을 항상 옆에 끼고 다니면서 그때그때 찾아봐야 했었다.
언어적인 면에서 애로점도 있었지만 문화적인 면에서도 이해가 안 가는 부분이 많았었다. 예를 들자면, 길거리를 지나가다 보면 남녀 커플이 주위 사람들의 시선을 전혀 의식하지 않은 채 껴안고 뽀뽀하던 장면, 초대를 받아 잔뜩 기대를 하고 가면 케이크 한 조각이나 커피 한잔이 고작이었던 것, 또 자기가 무엇을 먹을 때 옆 사람에게 먹어보라는 말 한마디 없이 혼자서 다 먹는 것 등등. 손님이 오면 있는 것 다 내놓는 사회에서 자란 우리에겐 모든 게 생소했다.
시간이 지나면서 모든 게 낯설었던 독일 생활에 익숙해지기 시작했고, 어떤 땐 생각하는 것까지 독일인이 다 된 것 같은 느낌이 들 때도 있을 정도다.
하지만 독일 생활 속에서 한국적인 것이 계속 유지되는 것이 있다. 한국인 엄마를 둔 아이들은 독일 애들과는 다르게 항상 바쁘고 시간이 없다. 왜냐하면 독일 학교를 마치면 다른 독일 애들과는 달리 피아노나 다른 악기, 발레, 운동, 수영, 미술 등을 배우러 가야 했다.
한국인 엄마들은 병원 근무를 끝마쳐도 집에서 쉬지 못하고, 피곤한 몸을 이끌고 아이들의 운전사가 되어서 개인 지도를 위해서 자녀들을 이곳 저곳으로 데리고 다녔다. ‘배우는 것이 힘이다.’라는 생각에서였다. 자기 자신이 가난에 시달리며 살다 보니 하고 싶은 공부를 하지 못했던 많은 간호사들(특히 간호 대학교를 나오신 분, 간호 보조사로 오신 분)은 이곳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의과대학, 간호학, 경제학, 심리학 등등 다양한 분야에서 열심히 학업에 매진해서 석사학위,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이들은 현재 독일 사회에서 많은 공헌을 하고 있다. 이런 분들을 보면 간호사인 입장에서 어깨가 으쓱해지고 한편으론 부럽기도 하다.
이렇게 한국 간호사들은 독일 사회에서 부지런하고 열심히 일하는 민족으로 인정 받으며, 한국의 문화와 생활 습관 등 많은 것을 독일인들에게 보여주고, 작년 2005년은 ‘한국의 해’로 정해서 꾸준히 성장하고 있는 고국을 독일에 자랑스럽게 알렸다.
독일에 뿌리를 내리고 정착해서 사는 한국사람들중에는 동포끼리 결혼을 해서 단란한 가정을 이루고 사는 재독 동포들이 있고, 또 독일인과 결혼을 해서 한독가정을 이루고 사는 재독 동포들도 있다.
이들은 한글학교를 세워 2세들에게 한국의 언어, 한국의 문화와 역사를 가르치기 위해 온각 노력을 다하고 있다.
간호사, 목사, 사회복지사들이 몇몇 가정의 아이들을 모아 한글을 가르치기 시작한 것이 계기가 되었는데 이중에는 30년이 넘는 긴 역사를 가진 한글학교도 있다. (내가 교장으로 있었던 마인츠 무궁화 한글학교가 한 예이다.) 현재 독일 내에는 35개의 한글학교가 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대부분의 재독 교포 2세들은 싱, 샹, 송 하며 손으로 눈을 옆으로 치켜 올려 철없이 놀려대는 이곳 아이들의 놀림의 대상이 되곤 했다. 또 그 당시 한국의 국력이 너무 약해서 한국하면 6.25전쟁으로 인해 폐허가 된 나라, 가난하고 굶주림에 허덕이는 사람들이 많은 나라로만 알려져 있었던 때라서 한국어를 배우려고 노력하기보다는 오히려 한국인 부모를 가졌다는 것 자체를 부끄럽게 여겼다.
이러한 이유로 그 당시 아이들에게 한국어를 가르치려던 부모님들의 마음이 2세들에게는 부담이 되었고 아이들을 괴롭게 했다.
나의 자식들이 한글학교를 6살에 처음 입학했을 때, 나도 이와 똑 같은 어려움을 겪었다. 남편이 독일인이다 보니 아이들을 강제로 토요 한글학교로 보내려는 나를 이해하지 못했다.
가기 싫어하는 아이들을 억지로 보내야 하느냐, 좀 더 커서 자기가 스스로 한국어를 배우겠다고 할 때 보내면 되지 않느냐고 해 부부 싸움도 자주 일어났다. 아이들은 토요일 아침마다 배가 아프고 머리가 아파서 한글학교를 못 가겠다고 해서 나를 갈등하게 했다.
이렇게 간호사 엄마들은 일뿐만 아니라 아이들의 교육에도 꾸준히 심혈을 기울여, 우리의 2세들의 한국어 교육에 많은 기여를 했다. 내가 알고 있는 함부르크 한인학교 이영남 교장, 브레멘 한글학교 김영희 교장, 베를린 한글학교 박은순 교장, 킬 한글학교 유경애 교장, 또 뒤셀도르프 한인학교 정운숙 교사는 각자의 바쁜 생활 속에서도 2세들의 한국어 교육을 위해서 각각 소속된 한글학교에서 자원봉사 활동을 하고 계신다.
이게 다 2세들의 한국어와 한국문화의 효율적인 교육 방법과 발전을 위해서이다. 이러한 분들의 한글학교에 대한 열정과 꾸준한 관심이 지금의 재독한글학교가 있게 된 데 큰 몫을 했고, 또 한글학교의 원동력도 다 파독간호사들의 노력과 땀의 결실이라 생각한다.
우리 2세들을 위한 한국어 교육이 지속적으로 발전하기를 기원하며 이 글을 마친다.
글: 문정균
<재독 한글학교 교장협의회 자문위원>
교정: 유로저널 오애순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