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로저널 380
고립감과 자유로움 - 리처드 세라3
공간과의 공명
묵직한 철을 소재로 부드러운 곡선 형태의 조각을 하는 리처드 세라(Richard Serra, 1939-2024)를 보통 미국의 미니멀리즘을 대표하는 조각가라고 말한다.
작품의 과정을 중시하고 특정 공간과 불가분의 관계 속에 전개되는 세라의 작품 세계는 ‘프로세스 아트’와 ‘장소특정적(Site-specific)미술‘이라고 한다.
Richard Serra, Sequence, 2006 (사진출처:flickr)
1960년대 설치된 작품을 관람할 때는 작품과 전시공간을 하나로 보는 것이 상식이었다. 그래서 리처드 세라도 장소로부터 작품을 분리할 수 없다는 것을 전제로 하며 작업을 했다. 그리하여 그의 작업은 작품이 설치된 공간과 작품, 그리고 관람객의 관계를 연결 지으며 맥락을 이루고 그 속에서 작품의 의미를 찾는 실험성을 내포하고 있다.
리처드 세라 작품을 감상하고 있는 관람객들
그의 ‘시간의 문제(The Matter of Time)(2005)’는 900톤이상의 무게에 4m가 넘는 높이의 거대한 부식된 철판으로 만들어진 작품이다. 그런데, 지지대도 없고 유연하게 구부러진 채 공간을 장악하고 있다.
그래서 작품을 둘러보는 관객들은 혹시나 철판이 무너지거나 흔들릴까 불안한 마음을 느끼게 된다. 그런데 이런 불안정함조차 리처드 세라의 오랜 경험으로 철저히 계산된 그리고 의도된 것이다.
우리는 그의 전시공간에 발을 들이는 순간 이미 그의 작품, 그리고 작품의 과정속에 들어가게 된다. 그리고 조각의 안과 밖을 왔다갔다 하면서 열려있는 공간에서 자유로움을, 반대로 폐쇄된 공간에서는 고립감과 함께 두려움을 느낀다.
미리 부식 과정을 거쳐 깊고 오묘한 색과 질감을 가진, 오로지 자신의 무게로만 지탱하고 있는 엄청난 규모의 작품을 오가고 있노라면 우리는 또한 시각뿐만 아니라 후각, 그리고 심지어 청각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지각을 동원하게 된다.
지그재그 모양으로 쭉 이어져 있는 거대한 철판 조각들 사이로 끊임없이 오가는 사람들의 말소리, 숨소리, 발자국 소리 등을 듣게 된다. 철판에서 나는 냄새, 그 공간을 채우는 사람들의 냄새까지 맡는다.
그러다가 우리는 결국 작품의 중심으로, 전시장의 중심으로 들어갈 수 없는 상황이 펼쳐지게 된다. 그런 상황 속에서 마침내 철조각의 미로에 압도당하고 만다.
높은 절벽길을 걷듯, 좁고 깊은 동굴 속을 헤매듯 긴장되고 흥분되고 두렵다. 그리고 순간순간 자신을 둘러싼 엄청나게 큰 철 덩어리에 비해 자신이 얼마나 작고 약한 존재인지 실감하게 된다.
감정의 파도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묘하게도 압도적인 물질성으로 인해 위협적으로 느껴지다가도 마음이 차분해지면서 명상을 하는 듯 편안한 기분도 든다.
Richard Serra, Backdoor Pipeline, 2010 © Richard Serra. Courtesy Gagosian Gallery
그리고는 마침내 철로 과감하고 압도적으로 채워놓은 전시 공간 속에서 우리는 조각과 건축의 모호한 경계를 오며가며 공간 속의 잠재적인 에너지와 움직임들과 함께 공명한다.
새로운 언어
리처드 세라는 철조각으로 우리들에게 너무나도 유명하지만, 사실 조각뿐만 아니라, 드로잉에 있어서도 끊임없이 새로운 언어를 탐구해왔다.
1971년부터 꾸준히 작업해 온 드로잉들은 조각에서와 마찬가지로 그의 작업의 기본요소인 시간, 과정, 그리고 물질성에 부합하며, 여러 시리즈로 제작되었다.
Richard Serra, Untitled, 1972 (사진출처: The Metropolitan Museum of Art)
그는 꾸준한 드로잉 작품들을 통해 드로잉의 역할과 가능성에 대한 비판적인 메세지를 전하고 싶었다.
2019년 뉴욕 가고시안 갤러리의 리처드 세라 전시 전경 (사진출처: GalleriesNow)
위 작품 속 검은 네모들은 오르락 내리락거리는 계단처럼 보이기도 하고, 레고 블락처럼 보이기도 한다. 이것은 2019년 뉴욕 가고시안 갤러리에서 열렸던 리처드 세라의 작품이다. 당시 이 전시는 리처드 세라의 대표적인 조각 작품 전시가 아니라 평면의 드로잉 전시라는 점에서 사람들의 이목을 끌어었다.
튼튼한 수제 종이 위에 페인트, 왁스, 그리고 색소 등으로 만든 검은색 페인트 스틱으로 그린 단순한 이미지의 드로잉이지만, 그의 조각 작품처럼 단단한 강철 조각의 물질성이 느껴진다.
Richard Serra, Pamuk, 2009 © Richard Serra / Artists Rights Society (ARS), New York. Courtesy of the artist and Gladstone Gallery. (사진출처: Christie’s)
빨려들어갈 것만 같은 블랙홀같은 이 작품은 리처드 세라의 2009년 작품으로 지난 2월 29일부터 3월 3일까지 열린 LA 프리즈에서 2 million 달러(한화 약 27억원)로 최고가를 기록하며 팔렸다. 검은색 페인트 스틱으로 작업한 이 작품도 또한 부식된 철의 거친 질감의 표면이 연상되면서 묵직하면서도 가벼운 그의 철조각을 떠오르게 한다.
열정적인 통합
리차드 세라는 조각작품, 드로잉 뿐만 아니라, 공공미술을 설치하거나 영상을 제작하는 등 다양한 매체를 통해 같은 주제를 서로 다른 언어로 표현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리고 제작 과정과 무게, 긴장, 균형, 그리고 움직임과 같은 여러가지 측면에 대한 다양한 연구를 하면서 그는 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열정적인 작업을 멈추지 않았다.
조형물을 만든다는 것은 평생에 걸친 헌신을 의미하고, 그것이 바로 그 의미이다. 내가 직접 열어본 작품의 방향을 따르고 그 안에서 가장 추상적인 제안을 하려고 한다는 뜻이다. 내 자신의 작품을 개발하고 그것을 개방적이고 활력 있게 유지하기 위해 필요한 것을 통합하는 것이다.
-리처드 세라-
(다음에 계속…)
유로저널칼럼니스트, 아트컨설턴트 최지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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