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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둑 이야기 : 독일 손병원님 기고

by 편집부 posted May 28,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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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둑 이야기

                                            독일 손병원 

 바둑 두는 것을 수담이라고도 한다. 손으로 나누는 대화이다.

중국의 고서 박물지에 의하면 바둑은 기원 전 2300년경에 고대중국의 요 임금이 두 아들을 깨치기 위해 발명했다고 한다.

바둑판은 정 사각형이 아닌 가로 42센치 세로 45센치 크기이다. 세로가 3센치 긴 것은 대국자의 시선 각을 맞추기 위함이다.

바둑판의 재질로는 은행나무 비자나무 계수나무를 최고로 친다. 비자나무는 황금색깔에 돌 자욱이 생기지 않는다.

바둑판의 밑 바닥 중간 네모난 구멍을 향혈이라 하는데 나무의 뒤틀림을 방지하고 착 점할 때 부드러운 소리를 낸다.

옛날 바둑 판에는 9 개의 꽃 그림을 그려 넣었으니 화점이라 부른다.

바둑판의 정 중앙을 천원이라 하여 우주의 중심을 뜻하고 바둑 돌이 흑백인 것은 음양사상에서 나오니 바둑에는 동양사상이 배어 있다.

바둑 알의 흑 돌은 까만 색의 자연석으로 만들며 흰 돌은 조개 껍질로 만든다.

100여년 산다는 왕대합은 무게가 1 톤에 달하니 바둑과 인연이 많다. 대중적으로 바둑 돌은 도자기 플라스틱 사기로 만든다. 흰 돌이 검은 돌보다 보이지 않게 작은 것은 돌의 빛 반사 때문이다.

흑 돌은 181개 흰 돌은 180개인데 흑 이 먼저 두기에 한 개가 더 많다.

바둑 통은 뽕나무나 느티나무가 제격인 게 몸의 나쁜 기운을 줄여준다.

이춘호 장인이 만든 바둑 알을 국내에선 최상품으로 치는데 규석의 원석으로 만들어 질감이 좋다. 한 벌에 3,000 만원을 호가하는데 2014년 중국의 시진핑이 방한했을 때 박근혜가 나전칠기와 함께 선사했다.

바둑 이야기 사진 1.png

바둑은 장시간 두기 때문에 집중하기 위해선 바둑 돌은 흑백만큼 좋은 색이 없다.

노란 색상의 나무 바둑판과 잘 어울린다.

바둑을 많이 두는 국가로는 한국 중국 일본 대만 베트남이다. 베트남의 호치민 시에는 한국 프로 기사가 기원을 운영하며 태국 방콕에도 한국 기원이 있다.

La에는 교민이 운영하는 기원이 3곳 있다.

독일 함부르크에는 여류 국수전을 3 연패한 윤 영선 사범이 바둑 보급에 열정을 다하고 있다.

매년 오순절 연 휴일에는 기도 컵 바둑대회가 함부르크에서 열려 유럽 권의 아마추어들이 많이 출전한다.

윤 사범에 의하면 유럽 권의 바둑애호가들은 거의가 컴 종사자 수학자 프로그래머라고 한다.

은퇴한 프로기사들은 세계 곳곳에서 한국바둑을 심어주고 있다.

한국기원에서는 국내의 바둑인구를 대략 800 만명으로 예측하는데 글쎄올시다.

바둑인구는 일본과 마찬가지로 슬슬 줄어들고 있다.

한창 배워야 할 청소년 층은 컴퓨터게임 전자오락 핸드폰게임등 디지털시대에 익숙해지고 있다.

이와 반대로 중국에서는 프로로 입단하면 동네 잔치를 벌인다.

명지대의 바둑학과는 2025년을 끝으로 종강 된다. 순천에는 바둑 중 고등학교가 운영 중인데 갈수록 인기가 많다.

바둑계에 진출하려는 프로 지망생들이 전국에서 다 몰려온다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니다.

한국기원에 등록된 프로 기사는 450명으로 9단은 104명이며 그중 여류기사는 85명에다가 9단은 6명이다.

프로 선수들이 많다 보니 동명이인이 몇 명 되고 같은 이름의 남녀도 있다.

남자 선수의 랭킹 1위는 55개월째 독주하는 신진서 9단인데 별명이 반신반인 신공지능으로 불린다.

신진서와 대국한 선수의 바둑 평은 지옥에 다녀온 격이라 한다.

일본 기사들 과의 대국에선 아직까지 한 번도 패한 적 없다. 일류 일본기사와의 실력차이는 2 점 접바둑 차이라 한다.

프로 세계에서 계가가 2점 반만 나도 크게 졌다고 하니 신진서가 엄청나다. 그의 유일한 바둑친구는 AI뿐이다. 여류 기사로는 2013년부터 1위를 달리는 최정 9단이다.

승단보다 입단이 어렵다는 프로세계가 바뀌어져서 매년 입단자가 17명씩 배출된다.

한국 중국에는 랭킹순위가 나오는데 일본은 타이틀 보유만 발표된다.

프로들은 AI 바둑으로 공부하여 대국 50수 까지는 서로 실력이 엇비슷하다.

아마추어들은 사이버오로 타이젬 넷마블 등등으로 온라인 바둑을 즐겨 동네 기원이 줄고 있다.

어린이들의 바둑입문을 위해 9 13줄 바둑이 있다.

프로들의 수 읽기에서 외길 수순은 40 수 전 후까지 본다고 한다.

마포구 경보기원은 일제 때 지은 경보극장 맞은편에 있는데 거기에서 차후 프로가 되는 숭문고교 교복입은 전영선을 만났다.

동네고수들의 바둑을 복기하며 해설하는 게 신기했다. 자기가 안 둔 바둑을 복기 한 다니.

프로들은 같은 돌로 바둑을 두는데 자기가 착 점 한 돌을 기막히게 알아본다.

중 종반쯤 진행되면 자기 바둑 돌 인지가 헷갈려 기보 담당하는 이에게 3번까지는 물어볼 수 있으나 상대보다 미리 3 번 물어본다면 반칙패라는 훈련을 하니 기보 암기는 필수코스이다.

전영선의 찌릿찌릿한 수가 자주 발생하여 별명이 전류인데 나중에는 쌍권총으로 불리운 게 항상 바지 뒷주머니에 소주 두 병 씩 차고 다녔다. 이창호를 키운 첫 프로기사이기도 하다.

바둑 이야기 사진 2.png

프로들의 바둑머리가 대단하다.

1945년에 한성기원을 운영한 조남철8단에의해 한국 바둑계가 시작되었다.

그 당시 승단 규칙이 까다로워 오랫동안 8단에 머무르다 규칙이 바뀌면서 입신이 되었는데 국내 첫 9단은 일본에서 돌아온 조훈현이다.

조남철은 일본어 바둑용어를 우리 말로 바꾼 업적을 남겼다아다리를 단수 우데까시를 환격으로 바꾸는데 오랜 시간이 걸렸다.

지난 5월 제 11기 대주 배 남녀 시니어시합에서 71세의 서봉수가 우승컵을 들었다.

그는 프로 입단 1 8개월 만에 명인전을 획득하니 19세였다. 바둑 유학이 일본이었던 그 당시에 오로지 독학하여 이룬 성과에 토종바둑 된장바둑이라 부른다. 그리고 후학들은 일본 행을 당연시하지 않았다.

16세에 제 3회 동양증권배 시합으로 세계 최연소 챔피언이 된 이창호는 세계 타이틀 21회 우승이란 금자탑을 세웠다.

별명이 돌 부처인데 대국 중에는 전혀 미동하지 않고 표정이 없다.

4 주간 기초군사훈련의 훈병 시절에는 군화 끈을 제대로 빨리 묶질 못해 집합시간에 자주 늦게 나오니 보다 못한 조교가 밤을 세워 군화에 똑딱 단추를 달아줬다는 일화가 있다.

세기적 수학자가 (이름이 가물가물) 구두 끈을 못 묶어 항상 끈이 풀린 채로 다녔다는 실화가 있다. 아인슈타인도 구두 끈이 풀어지면 손녀가 묶어줬다고 한다. 천재는 엽기적인 그 무언가 가 있는 모양이다.

중국 출신인 객원 여류기사로 전투바둑의 루이나이웨이는 제 43회 국수전에서 여 기사 최초로 우승했을 때의 일화가 있는데 ㅡ 기라 성 같은 선수들을 제치고 결승전으로 가는 상황에서 심기가 편치 않았던 조남철9단이 남자 선수들에게 가위 하나씩 줬다.

현대 바둑의 창시자는 중국인 오청원인데 오랫동안 내려오던 금과옥조 같은 바둑 틀을 거의 바꾼 천재였다.

바둑은 순수 우리말이고 바둑 종주국 중국에서는 웨이치라 부르나 오래전부터 세계에 바둑을 전파한 까닭에 일본어 -가 표준 용어가 되었다.

명지대 남 치행 교수가 Go Terms 라는 바둑 용어사전을 만들었는데 한국어 중국어 일본어 영어 명칭을 함께 수록했다.

내가 바둑을 배우게 된 동기는 중학생일 때 집으로 가는 길목에 교복 만드는 집을 지나쳐야 했는데 그때 한 여름이라 가게 앞 공터에 평상을 펴고 직원 둘이서 바둑두는 것을 처음 보았다.

두꺼운 종이에다 19줄 바둑줄을 긋고 흰 교복 단추와 검은 단추로 바둑 알을 대신했다. 바둑이 끝나고 둘이서 웃고 떠들면서 계속 바둑 얘기만 하길래 바둑의 묘미가 있겠구나 생각하고 관심을 갖게 되었다.

고려시대때 창건된 국보 제 15호인 봉정사 극락전은 안동시 서후면에 소재하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목조건축물이다.

내가 중학시절 봉정사 주지스님이 안동으로 출장 오시면 큰 집에서 운영하는 여관에서 자주 투숙하셨는데 그때마다 스님과 바둑을 두었다.

내가 봉정사 놀러가서 스님을 만나면 내 바둑친구가 왔네 하시면서 반갑게 대해 주셨다.

군대에서는 고수 아닌 고수로 대접받아 대대장과 즐겨 대국했으니 군대 팔자가 늘어졌었다. 내 근무처는 VIP들이 자주 왕래하는 터라 접대용 바둑판이랑 성능 좋은 전축이 비치돼 있었고 휴식시설이 다양했다.

인사과의 말뚝 상사가 바둑판에 눈독들이고 있었는데 드디어 접근해왔다. ', 손 병장 니가 바둑 좀 둔 다니 내하고 한번 두자'더니. 몇 번 인가 바둑 둔 다음 하는 말이 무거운 바둑판을 매번 들고 다니는 게 힘이 드니 여기다 놓고 지내자."고 말했다.

나는 파견근무여서 중대 본부와 거리가 있었다. 그 길로 슬그머니 빼돌렸다.

삼국지에는 전장에서 팔에 독 화살 맞은 관운장을 화타가 뼈를 깍는 수술할 때에 바둑을 두었다고 한다.

바둑을 두면 시간 가는 줄 모른다. 바둑 이외의 생각은 전혀 나오지 않는다. 참으로 오묘한 수가 천수 만 수이다.

바둑 이야기 사진 3.png

뒤셀도르프에 사는 강 아무개는 부산 휴가내내 바둑만 두고 왔다고 실토했다.

삼국유사에는 고구려의 승려 도림이 첩자 역할의 임무를 띄고 백제의 개로 왕에 바둑으로 접근하여 신임을 받은 틈을 타서 개로를 죽음으로 몰았다.

독일 교민사회에서는 내가 알기로는 프랑크푸르트 바둑동우회가 가장 활동성이 있다.

회원수가 타 지역 보다 많고 정기적 모임이 즐겁다. 그간 4명의 회원이 타계했다. 황 아무개의 장례식에 관을 안치할 때 어떤 이는 꽃송이대신 바둑돌을 던졌다. 천국에서 바둑을 실컷 두라는 위안이었다.

국수전 준 우승을 두 번 한 이 창세 사범은 고향 선배로 프랑크푸르트에서 호텔을 운영했을 때 가끔 들려 바둑을 두곤 했는데 선비스타일로 아주 조용한 성격이었다.

서울대 재학시절 프로선수생활을 겸했는데 방학 때 고향에 돌아오면 벌써 소문이 나서 바둑애호가인 지역유지들의 초청을 받고 대국 후에는 노란 편지봉투를 하나씩 받았는데 그걸 다 모으면 1년 등록금이 되었다고 웃으면서 옛날을 회상했다.

김인 국수나 윤기현 등의 또래 기사들이 바람 쐬러 독일에 와서 밤새 이 사범과 어울려 바둑두는 모습이 기억된다.

바둑얘기에서 항상 회자되는 말에는 신선 놀음에 도끼자루 썩는 줄 모른다.

바둑은 신선들의 놀이일정도로 기품과 예가 있다. 인생의 축소판이다. 바둑을 두기 전에 위기십결을 한 번 더 되 뇌이면 마음가짐에 무장이 된다. 삶의 교훈적 가치가 꽉 차 있다.

묘수 3번에 패한다는 말은 반짝 변칙보다는 원칙과 정석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뜻이다.

-멀리서 벗이 찾아오니 이 또한 기쁘지 아니 한가, 배우고 때때로 익히면 기쁘지 아니 한가 - 논어의 한 구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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