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영국은 때 아닌 장마철이다. 휴가 차 한국을
다녀온 이래로(심지어 영국에 도착한 날도) 거의 매일 비가 내린다.
원래 비가 많이 오는 것으로
유명한 영국이지만, 최근 몇 년 동안에는 영국에, 아니 적어도 런던 지역에는 비가 잘 내리지 않았다.
특히, 올해 초에는 거의
비가 내리지 않아서 극심한 가뭄까지 생겼고, 그래서 3월까지만 해도
그렇게 가뭄이 들었으니 물을 아껴 써야 한다는 공익광고(?)도 심심찮게 보였던 차였다.
그런데, 요 몇 주 동안은
정말 한국의 장마철이 연상될 만큼 쉴 새 없이 비가 내린다.
보통 영국의 비는 자주 내리더라도
잠시 뿌리고 지나가는 비가 많은데, 이번 비는 몇 시간이고, 또 밤 새도록 내리기도 하는 등 평소 영국에서 만나볼 수
있는 비가 아니다.
나처럼 비를 좋아하는 사람이야
영국의 이런 예상치 못한 장마가 반갑지만, 화창한 날씨를 좋아하는 대다수의 사람들은 요즘의 영국 날씨가
마냥 원망스러울 듯 하다.
오늘도 그렇게 온 종일 비가
내리더니 퇴근길에는 빗줄기가 잠시 가늘어졌다.
하늘도 마냥 비를 뿌리다가
지쳤는지 잠시 한 숨 돌리려는 듯 했다. 그리고, 아주 잠시나마
햇살도 모습을 드러내려는 듯 보였다.
이윽고 집에 도착해서 방에
들어가 창문 밖을 바라보니 어느새 멋진 무지개가 드리워져 있었다.
그 아름답고 신비로운 모습에 반해서 얼른 카메라를 꺼내서 그 광경을 사진에 담아보았다.
그렇게 한 동안 무지개를 바라보고 있노라니 고단한 하루 일과를 마치고 지쳐버린 몸과 마음이 가벼워지고, 괜히 신이 나기도 하면서, 쫓기듯 달려가고 있던 현실의 발걸음이 잠시 멈춰서 버렸다.
얼마 만에 보는 무지개인지, 또 얼마 만에
이렇게 무지개를 그야말로 감상하기 위해 잠시 멈춰선 것인지...
어린 시절에는 정말 어쩌다가
볼 수 있었던 무지개가 그렇게 신기했었는데, 그리고 지금도 저 무지개는 여전히 변함없이 너무나 신비롭고
아름답기만 한데...
아마도 변해버린 것은 이제는
무지개가 떠도 무심히 하던 일을 지속하고, 가던 발걸음을 재촉하기만 하는, 어느새 그런 무지개를
봐도 별 다른 감흥을 느끼지 못하게 된 나 자신임을 깨닫는다.
대학교 1학년의 어느 봄
날, 고향 일산에서 피아노를 전공하는 후배와 식사를 하고서 식당 밖으로 나왔더니 정말 너무나 아름다운 무지개가 드리워져 있었다. 후배와 한참을
그 무지개를 말 없이 바라보았다.
그리고, 나는 그날 밤
그 무지개를 소재로, 무지개를 보며 느낀 것들을 가지고 노래를 만들었고, 함께 무지개를
본 피아노를 전공하는 그 후배에게 부탁해서 악보까지 만들고서 너무나 좋아했던 기억이 난다.
그렇게 무지개를 보고서 노래까지 만들었던 나였는데, 언제부턴가 무지개를 봐도 별 다른 감흥을 느끼지 못했던 것 같다.
무지개의 신비로움 보다는 당장 내 앞의 현실에 놓여진 수 많은 과제들, 그리고 그 과제들을 완수함으로 인해 내게 주어지는 달콤한(?) 경제적, 사회적 상승에 더욱 취해버린 걸까?
지금 저 창 밖의 무지개를
바라보며 수 많은 어린이들은 그 시절 내가 그랬던 것처럼 신비로운 꿈을 꾸고 있을텐데...
그러나, 아마도 저 무지개를 바라보며 아무 느낌 없이 하던 일을 지속하고, 가던 발걸음을 재촉하는, 아니 심지어 무지개가 떠도 무지개를 쳐다보지도 않을 어른들도 많을
것이다.
살아가면서 더 이상 신비로울
것도, 새로울 것도 없게 된다는 것은 너무나 서글픈 일이다.
하지만, 고단한 하루 하루가 이어지고, 또 그렇게 고단한 한
해, 한 해가 이어지다 보면 어느새 우리들의 감성은 메말라가고, 마음은
굳어져가며, 결국 모든 게 무미건조해진 채 그저 하루 하루 주어진 일과를 처리(?)하는 게 삶의 전부인 것처럼 여겨지게 된다.
그래서 우리는 이렇게 잠시나마
멈춰설 수 있는 여유가 필요하다, 나를 둘러싼 치열하고 고단한
현실들로부터 잠시 눈과 귀를 닫고서, 내 마음에 가득한 고민과 스트레스들을 잠재우고서.
이 글을 읽고 계시는 여러분들은
다음에 또 무지개가 뜨면 절대 그냥 하던 일만 지속하거나, 가던 발걸음만 재촉하지
않으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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