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초대 받은 자들
그날은 유난히 맑고 쾌청한 날이었다. 5월 13일.
베를린 Tegel공항엔, 나를 포함해 고국으로부터 초대 받은 교민들이 탑승을 기다리고 있었다.
2012년 5월 14일 부터 5월 18일 까지 대한민국 행정안전부 내 이북 5도 위원회가 초청한 2012년 국외이북도민 고국방문단 행사에 참석하기 위해서다.
이 행사에 초대 된 국외교포는 5 개국에서 총 286명(남 142명, 여 142명)이었고 독일교민은 25명이다. 좀 더 구체적으로는 미국 174명, 캐나다 44명, 호주 32명, 독일 25명, 아르헨티나에서 9명의 교민이 초청되었다.
이들은 모두 북녘 땅에 고향을 둔 실향민이거나 그 땅에 가족과 친척을 둔 이산가족 및 자손들이다. 그래서인지 서로가 안면이 없는 사람들이어도 보이지 않는 띠로 연결된 것 같은 공감대를 느끼고 있었다. “오디서 오셨습네까?” “고향이 니북 어뎁네까?”하며 반갑게 말을 나누는가 하면, 가족이나 자식들에 대한 매우 개인적인 테마까지도 서슴없이 말하는 모습들을 보면서 이런 것이 동포애인가? 하는 생각을 했다.
베를린에서 동행하는 분들 중에 유난히 연세 드신 분이 계셨는데, 그 분은 독일 간호사로 오신지 50여년이 지났다고 했다. 세월이 흐르는 물 같다고 했던가, 꽃다운 나이에 이곳에 와 일흔 다섯의 연세가 되셨지만 유난히 총기가 밝으시고 거뜬히 일정을 소화하시는 모습을 보여 주셨다.
고국으로 가는 항공기 안에서 마침 유럽과 독일을 여행하고 돌아간다는 은퇴 여교사 한 분과 자연스러운 대화를 나누었는데 그동안 고국의 발전상을 이모저모 알려 주면서 달라진 사회상을 이렇게 풍자했다.
“요즈음 한국에서 여성이 나이 들면 다섯 가지가 있어야 합니다. 첫째는 돈이 있어야 하고, 다음으로는 당연히 건강해야 하고, 다음에는 딸이 있어야 하고 또 다음엔 여자 형제 그리고는 여자 친구가 있어야 한답니다.”
그래서 “그러면 나이 든 남자는 무엇이 있어야 한답니까?” 하고 물었더니, “남자가 나이 들면 첫째는 아내가 있어야 하고, 다음으로는 부인이, 그 다음엔 집사람이 그리고는 안 사람과 마누라까지 있어야 합니다”라고 말하는 것이다. 나이 들면, 다만 부인에 의존하는 남편들의 모습을 나타낸 것이리라.
더더욱 남편이 노후를 편안히 지내려면 하루에 세 마디 “요”만 해야 한다는데 그것은, “당신이 제일 이뻐요.” “당신 만든 음식이 제일 맛있어요.” “사랑해요” 라고 하면서, 나에게도 이 세 마디 “요”를 아끼지 말고 노후를 편히 보내라고 조언해 주었다. 그동안 여성의 위치가 많이 진작된 고국의 세태를 말해 주는 풍자가 아닌가 여기며 웃었다.
드디어 프랑크푸르트를 경유해서 일행은 5년 연속 세계 국제공항 서비스 1위를 지키고 있는 인천공항에 도착했다. 인천공항의 여러 가지 면모 중에 특별히 내 눈에 뜨인 것, 공항 내 한쪽에 자리 잡은 기도실이었다. 사람마다 종교는 다르겠지만 승객 개개인의 특성까지 세밀히 배려해 보이는 발상을 느낄 수 있어 좋았다.
공항의 터미널은 먼 길을 떠나고 돌아오는 승강장이다. 저마다 꿈을 품고 기대를 갖고 북적이고 있다. 인생을 길 가는 나그네로 비유했던가, 그렇다면 길손에게 있어야 할 두 가지, 그것은 나아갈 길과 그 길을 밝히는 빛일 것이다. 그래서 공항의 기도실은 나그네가 마음의 빛을 준비하는 곳이리라 생각해 보았다.
모두가 그렇겠지만, 10년 만에 고국 땅을 밟는 나로선 감회가 깊을 수밖에 없다. 이북 5도 위원회의 정성어린 환대를 받으며 고국 방문단 284명을 태운 버스는 넓고 아름다운 인천 갯벌을 가로질러 한강 변의 올림픽대로를 달려가 이태원의 한 대형 호텔에 여장을 풀었다.
마침 서울을 상징한다는 남산 타워가 호텔 창문으로 아련히 보였고, 이태원언덕에 조밀하게 나열된 주택
들의 정경과 그 사이에서 자태를 드러낸 남산 길은, 오래전 서울에서 살던 빛바랜 추억의 그림자를 느끼게 해 준다. 초대한 고국의 정성과 초대 받은 자의 감사가 어우러진 향기로움으로 고국의 첫 날 밤은 그렇게 저물어 갔다.
2. 피의 보상
나의 이번 고국방문 중에서 온 마음을 울리게 한 일정은 예전에 동작동 국립묘지로 불렸던 현충원 참배였다. 국립서울현충원은 1955년 7월 15일 국군묘지로 창설되었고, 10년 뒤 1965년 3월 30일 국립묘지로 승격되어 국가원수, 애국지사, 순국선열, 국가 유공자, 순직경찰관이 추가로 안장된 곳이다. 그 후, 2006년에는 국립서울현충원으로 개명되었고 1979년에는 국립대전현충원이 추가로 조성되었다.
경내에는 무명용사탑, 전쟁기념관, 현충관 충렬대 등이 있으며 우리 민족의 커다란 슬픔과 상흔으로 남아 있는 6.25사변으로 전사한 영령들 54,751위,(무명용사1003위 포함) 고 이승만, 박정희, 김대중 대통령, 18인의 임시정부 요인, 애국지사 247위, 순직경찰관 926위 등의 애국선열이 안장되어 있다.
개인적으로 나의 부친은 6, 25 전란 중에 돌아 가셨다. 피난의 와중에 잃어버린 짐 보따리로 인해 아버지의 사진조차 유실 되었다. 그래서 아버지의 얼굴을 본 적이 없다. 나는 초등학교 가정환경 조사서에 아버지가 없다는 사실을 밝히지 않았다. 아버지가 계시지 않는다는 결손의 아픔과 상실감이 내 어린 시절을 내내 슬프게 했던 것 같다. 피난 중에 남편을 잃은 어머니는 10년 손위의 누님과 나를 길러 내느라 갖은 고생을 감내하시며 오직 기도하는 삶의 모습을 내 마음에 남겨 놓으셨는데 94세에 돌아가신 어머니가 나에게 유일하게 남겨 주신 유산이 있다. 손 때 묻은 성경책 한 권, 그 안에 적어 놓으신 “고요하라. 기도하라.”라는 글귀였다. 나는 어머니의 사랑과 신앙을 내 가슴에 묻었다.
내가 여기서 개인적인 이야기를 잠시 언급한 것은 6.25 전쟁이 휩쓸고 간 그 엄청난 상처의 흔적이 온 국민의 삶에 얼마나 크게 자리 잡아 왔는가를 생각해 보라는 뜻이다. 소중한 부모, 자식, 형제, 겨레를 갈라놓게 한, 6.25 전쟁은 불과 62년 전의 일이요, 그 엄청난 재해와 폐허를 딛고 일어선 우리 민족은 선진국의 대열에 서서 국민고소득의 경제대국, 문화강국, 과학기술의 나라로 일어섰다. 그러나 이 모든 번영의 바탕에는 내 나라를 지키고자 죽어 간 수많은 희생자들의 피와 이루 말 할 수 없는 슬픔이 있었음을 잊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내가 현충탑 안으로 들어섰을 때, 가령 육군 일병 누구, 아무개라는 작은 명패들이 빼곡히 걸려 있었다. 그 작은 명패들이 왜 그렇게, 보는 사람들의 가슴에 큰 울림으로 밀려오던지,,, 일행 중, 어느 한 분은 벽에 머리를 묻고 한 참 동안을 흐느껴 울고 있었는데 그 모습은 지금도 내 눈에 선하다. 그것은 가신 분들에 대한 남은 자들의 회한과 감사의 눈물이 아닐까?
전쟁은 소수의 사람들이 일으키지만 그 엄청난 대가는 고스란히 온 민족이 치루는 몫이다. 그래서 어느 역사에서도 전쟁을 일으킨 전범들에 대한 심판은 엄중히 묻게 된다. 현 시점으로부터 6.25 전쟁이 끝난 지 62년이 흘렀건만 민족의 피로 온 강토를 나라를 물들게 했던 그 전범들은 지금 어디에 있는가? 그들은 북녘 땅, 민족의 절반을 통치하는 통치권 집단이 되어 세습에 세습을 거듭하며 현실적으로는 위협과 굶주림으로, 사상적으로는 북한에 있는 우리 겨레의 민족혼을 말살시키고 있는 것이 아닌가?
나의 이런 시국관에 대해 어느 분이 물은 적이 있다. “목사님은 반공교육을 철저히 받은 세대라서 그런 것 아닐까요?” 그때 나는 이렇게 대답했다. “내 개인적인 생각에는 이 지구상에서 공산주의가 가장 없는 곳이 북한이라고 생각합니다. 오로지 체제유지와 3대 세습 통치 그 하나에 정치, 사회, 군사, 문화, 교육, 종교 모두가 족쇄 채워져 있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분명히 올바른 관점을 갖고 민족의 현 상황을 직시해야 한다.
<3 쪽>
현충원을 나올 때, 시인 노산 이은상이 쓰고 고 박정희 대통령이 친필로 기록해 놓은 휘호가 보였다.
“여기는 민족의 얼이 서린 곳, 조국과 함께 영원히 가는 이들, 해와 달이 이 언덕을 보호하리라”
글귀를 음미하면서 나의 손은 고요히 현충탑을 어루만지고 있었다.
그렇다. 오늘 우리 민족의 번영은 나라를 지키고자 흘린 피의 보상이다.
3. 귀향의 소망
내가 이북5도위원회 초청 행사로 여행한다고 하니 어느 분이 물었다. “목사님, 이북 어디로 여행하신다구요?”
그만큼 이북5도위원회에 대해 모르는 분들이 계신다. 국내에서도 그렇고 해외에서 사는 교민은 더 더욱 그런 것 같다.
이북5도위원회는 약 팔백 팔십 삼 만 명으로 추정하는, 이북을 원적으로 둔 황해, 평남, 평북, 함남, 함북 그리고 수복되지 않은 경기 강원 도민들로 구성되었고 대한민국행정안전부 내에 소속되어 있다. 행정안전부 수뇌는 장관급, 이북5도위원회의 위원은 차관급 공직자들이다.
1949년 5월에 이북5도청으로 개칭한 이래, 이북5도에 관한 특별조치법, 명예시장 및 군수제 실시, 명예 읍, 면장제 실시, 2010년 1월에는 시 단위 명예 동장제 실시로 조직을 확대하였다.
이북5도위원회는 현재 구기동에 소재하면서 이북5도의 각 분야 별 정보수집 및 분석, 북한지역 수복 시 실시할 제반 정책의 연구와 월남한 이북5도민과 관련단체 지원과 관리, 북한이탈주민 및 이북도민 후세대 육성과 지원 그리고 이북5도 향토문화 계승, 발전 등의 주요기능을 면밀히 수행하고 있었다.
이번 이북5도위원회 초청 국외이북도민고국방문단 행사는 국립서울현충원 참배, 이북5도위원회 방문, 청와대 예방, 천안함 현장, 산업시찰,(기아 자동차) 국정원 방문, 전쟁기념관, 경복궁, 청계천 탐방으로 막을 내렸다.
지구상 유일한 분단국가라는 우리의 특수상황과 장차 통일에 대비해야할 오늘의 시점에서 이북5도위원회가 담당해야 할 역할은 매우 중차대하다고 여겨진다.
특히, 나라의 지속적인 경제성장과 사회의 안정을 위하여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은 사상성의 안정과 균형이다. 혹자는 말한다. 지금 우리나라의 우익, 좌익의 사상성 대립과 혼선은 6.25전쟁 이전의 상황을 방불케 한다고---- 이 말이 결코 기우에 지나지 않는 것일까? 물론 지나친 불안심리가 바람직하지는 않다 하더라도 지금은 대한민국의 국제적 입지가 높아졌으며, 국제공조도 한껏 성숙되어 있어서 전면전의 위험은 상대적으로 줄어 들었다하지만 사상성의 혼란은 상존하고 있는 내부의 적이 아닐 수 없다.
돌이켜 보면 우리나라의 번영은 실로 기적과 같은 일이었다. 60여 년 전 우리는 모든 것을 잃었다. 일본의 식민 지배를 막 벗어난 다음에 일어난 6,25 사변은 너무나도 가혹했다. 그때 국민들의 소망은 굶지 않고 하루를 보내는 것이었기에, 당시 유엔에 등록된 120여 개 국 중에서 한국은 1인당 국민소득이 76달러에 불과하여 인도다음으로 가장 불쌍한 나라였다. 같은 분단국이었던 서독으로부터 1억 4천만 마르크의 차관을 얻는데 성공할 때에는 서부 독일이 필요로 하는 간호사들과 광산 근로자들을 파독하고 그들의 봉급을 담보로 잡히는 것이다. 서독으로부터 이렇게 얻어 낸 차관은 대한 조국을 일으킬 기반이 되었다. 한국의 근대화는 서독 파견 간호사와 광부들로부터 시작되었다함은 과언이 아니다.
스무 살, 갓 넘긴 꽃다운 나이에 낯선 땅 서독으로 온 간호사들 중에는 거즈에 알코올을 묻혀 시신을 닦아 내는 일을 하는 분들도 있었고, 광산 근로자들은 지하 1킬로미터 이상의 땅속으로 내려가 뜨거운 지열을 견디면서 있는 젊음의 힘을 다해 성실히 일을 하였다.
이렇게 땀과 눈물로 일구어낸 대한민국은 오늘에 이르러 1인당 국민소득이 2만 달러를 웃돌아, 건설산업 <4 쪽>
의 규모 세계 3위, 단일원자력발전소이용률 세계 5위, 철강제조 산업 세계 5위, 조선 산업 세계 1위, 세계
무역규모 12위권, 외환보유 세계 4위, 세계자동차생산 5위, 반도체생산 세계 1위, LCD 생산산업 세계 2위, 휴대폰산업 세계 2위, 컴퓨터보급률 세계 1위, 초고속통신망 보급률 세계 1~2위, 학교정보화시설 세계 1위, 디지털기회지수 세계 1위라는 통계를 가진 나라로 성장했다. 이것은 기적이라기보다는 굶어 죽는 가난만큼은 자손에게 대물림 하지 않겠다는 땀과 눈물 그리고 의지의 결정체라 말해야겠다.
분단된 조국 대한민국이 이렇게 성장하는 동안, 북한의 통치권자들이 한 일은 도대체 그 무엇이었던가? 세습체제유지, 강성대군, 대남사상전 같은 정책이 과연 기아에 시달리며 굶어 쓸어지고 턱없이 죽어가는 북한 인민들을 살릴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이것은 누가 봐도 자멸의 나락으로 떨어져 가는 북한의 통치노선이다. 이제부터라도 시장경제, 건전외교개방과 같은 오늘의 지구촌과 공생하는 길을 똑바로 찾아야 하지 않겠는가?
우리의 속담에도 바람 따라 돛을 달고 물길 따라 배 띄우라 하지 않았나? 핵무기를 비롯한 군사력으로 굶주린 국민들을 먹여 살린다는, 시대착오적 통치권자들을 과연 그 누가 납득하겠는가? 아이들은 굶주려 죽어가고 있는데, 국민총생산량의 25%를 국방비에 쓰면서, 100만의 군대가 언제나 공격할 준비를 갖추고 있는 북한.
이러함에도 불구하고 전쟁과 가난, 땀과 눈물의 지나간 세월을 모르는 젊은 세대들이 작금에 좌경화 바람에 현혹되어서 올바로 분별을 못하는 모습을 볼 때, 참으로 안타깝기 그지없다.
역사는 언제나 순리를 따라 흐르고 민심은 안정과 균형을 지향하는 법이다. 역사는 궁극적으로 진실을 가지고 나아가는 사람들, 평화를 모색하는 사람들의 편에 선다. 이것이 하늘의 천리며 또한 땅의 순리이다.
4. 고국을 떠나오며
나의 이번 고국방문은 조국의 번영에 감사함과 동시에 좌경화의 사상적 혼란에 대한 우려를 체감하는 여행이기도 했다. 동시에 우리 국민의 사치와 소비풍조에 대한 우려감 또한 떨칠 수 없는 여행이었다.
지금의 스페인과 그리스가 겪고 있는 경제위기와 원인을 같은 유럽에서 실감하고 있기 때문인지 조국은 지금, ‘과도한 복지’라는 샴페인을 터뜨릴 때가 아니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리스는 국민소득 2만 달러가 넘어서자 과도한 복지정책을 펼쳤다. 대학원생의 학비와 기숙사비 생활비까지 무상교육을 실시했지만 학부를 마치고 나온 젊은이의 43%가 일 할 직장이 없고, 그리스 정부는 일자리를 만들기 위해 공무원 수를 크게 늘여 공무원에게 지불해야하는 임금으로 정부예산이 허덕였다. 산업을 일으키진 않고 관광산업에 의존하면서 노동인구의 25%가 일거리가 없기에 오후 2시 반이면 퇴근하는 상황이라니, 바탕이 허술한 경제체질위에 터트리는 과도한 복지는 위험하기 그지없이 없다는 교훈을 보여주었다. 그리스의 상황을 타산지석으로 삼아 볼 때, 지금 우리의 조국의 국민들도 사치와 소비의 샴페인을 터트릴 때가 아니라는 생각을 하게 되는 것이다
한마디로 수도권은 역동적이었다. 그 빠른 속도감을 실감하면서 내 마음속에는 “어디를 향하여?”라는 물음과, 그 거대도시의 면면을 보면서 “무엇을 위하여?”라는 질문이 들려왔다. 이것이 과연 나만의 지나친 철학관 때문일까? 하기야 이러한 것들은 한국이든, 독일이든, 현대를 살고 있는 우리 모두에게 피할 수 없는 질문이기도 하다.
그러나 우리나라가 분단의 현실을 극복하고 그간에 땀과 눈물로 일구어 냈던 발전을 지키면서 진정한 번영으로 나아가기 위하여 실로 중요한 기로에 서 있는 것만은 분명하다.
모국을 뒤로하고, 독일 행 항공기에 몸을 싣고 돌아오는 길, 나는 톨스토이가 한 말의 짧은 대목을 떠 올렸다. “나누어진 산과 산은 만날 수 없지만 살아 있는 사람들은 다시금 만날 수 있다...."
언제인가, 둘로 나누어진 조국의 심장이 봉합되는 날, 막혔던 혈관이 흐르고 번영의 맥박이 뛰게 될 그 날을 기도하면서. 나의 고국기행은 이렇게 막을 내렸다.
“사랑합니다. 나의 조국, 대한민국!”
◊ 조국기행 : 김 성일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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