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영화를 본 이야기를 써 본다.
‘건축학개론’, 당시 ‘X세대’라고 불리웠고, 현재 30대 중반 직장인으로 한창 사회에서 땀을 뻘뻘 흘리고 있는 내 또래 남성들이 혼자 극장에서 관람하는 기현상(?)을 발생시킨 올해 상반기 흥행작이다.
이 영화가 첫사랑에 대한 이야기라는 것 까지만 딱 듣고서, 이 영화에 대한 줄거리나 비평 등 어떤 사전 정보에도 눈과 귀를 닫고 있었다, 순수하게 이 영화를 만나는 온전한(?) 감상을 위해서.
그리고, 드디어 지난 주말, 비가 추적 추적 내리는 토요일 오후, 혼자서 소주를 홀짝거리며 이 영화에 취해버렸다.
영화는 현재와 과거를 오고 가면서 주인공들의 대학 1학년 당시 첫사랑과 그 시절의 이야기들, 그리고 어느새 너무나 먼 각자의 길을 와버린 현재의 이야기를 보여준다.
이 영화가 30대 중반 남성들에게 크게 어필한 것은 시대 배경을 현재 30대 중반 남성들이 대학생이었던 시절로 잡았고, 그 시절의 소소한 추억들을 영화 곳곳에 배치해두었기 때문이다.
이 영화를 굳이 영화 평론가처럼 오밀조밀 뜯어보면서 비평할 필요는 없을 듯 하다.
그저 그 시절의 추억을 갖고 있는 그 누군가에게, 그리고 어느새 바쁘고 고단한 현실에 치여서 그 추억을 잊고 지낸 그 누군가에게 아주 잠시라도 그 추억으로의 여행을 선사해줄 수 있다면, 그것 만으로도 이 영화는 충분히 그 존재 가치가 있다.
나 역시 이 영화를 보면서 어느새 나의 첫사랑을 만났던 시절로 돌아가고 있었다.
대학교 2학년의 어느 봄날 예고도 없이 찾아온 첫사랑, 그 어설프고 풋풋했던, 하지만 더 없이 설레이고 흥분되던 그 시절...
‘건축학개론’ 속 주인공은 연애박사인 재수생 친구가 이런 저런 코치를 해주지만, 나는 주위에 그렇게 연애박사인 친구도 없었기에, 대학 1학년 때는 나처럼 그저 막연히 첫사랑을 기다리던 숙맥 친구들과 잘 알지도 못하는 여자 얘기, 연애 얘기로 밤이 새도록 술잔을 기울이곤 했었다.
그러다가 어느새 하나 둘씩 첫사랑을 만나고, 주말, 공휴일이면 할 일이 없어서 으레 모여서 술잔을 기울이던 친구들은 여자친구와 시간을 보낸다며 어느새 점점 얼굴을 보기가 힘들어져 갔다.
당시 우리가 여자친구와 보내는 시간은 대부분 비슷 비슷 했다. 극장에 가고, 신촌, 명동, 대학로를 거닐고, 놀이동산에 가고, 그러다가 진도가 좀 나가면 비디오방이라는 으슥한(?) 곳을 찾게 되고...
하지만, 첫사랑이란 대부분이 그렇듯 헤어질 운명인지라, 내가 아는 모든 이들은 하나 둘씩 첫사랑과의 헤어짐을 경험해야 했고, 나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특히, 우리들의 군 입대는 결정타였다. 그래도 내 첫사랑은 내가 입대하고서도 1년 동안이나 꾸준히 편지를 보내주며 나름대로 의리를 지켰다. 어떤 놈들은 훈련소 기간이 채 끝나기도 전에 첫사랑의 배신을 경험해야 했다.
입대한 지 1년이 지나 군 생활이 어느 정도 할만해지는 시점인 상병을 달기 바로 직전, 일병 선임이라는 가장 힘든 한 달을 보내던 중, 나는 첫사랑으로부터 이별 통보를 받았다.
하필 때는 매서운 칼바람이 불던 겨울, 원래는 상병이 된 즐거움을 만끽하기 위해 잡았던 10일이나 되는 긴 휴가를 나왔건만, 눈발이 흩날리는 신촌의 밤거리에서 술에 거나하게 취해 혼자 버스를 기다리는데, 팔짱을 끼고 거니는 연인들이 어쩌면 그렇게 꼴도 보기가 싫던지...
그 때는 그렇게 큰 상실감과 상처를 안겨줬던 그 첫사랑은 어느덧 두 아이의 엄마가 되어 있다는 소식을 마지막으로 들은 게 벌써 오래 전이다.
그리고, 아주 가끔 꿈에서 그녀가 나타나기도 한다. 이제는 어떤 아쉬움도 남아 있지 않은 만큼, 그렇게 꿈에서 나타나는 그녀는 마치 내가 아주 오래 전에 써둔 일기장을 오랜만에 발견한 것과 같은 반가움으로 다가온다.
그냥 그 시절의 추억을 만들어주었다는 것만으로도, 또 비록 당시에는 나름 큰 슬픔이었지만, 어쨌든 떠올려보면 슬그머니 미소가 지어지는 이별까지도 선사해주었다는 것만으로도 그녀에게 고맙게까지 느껴진다.
두 번 다시는 가져볼 수 없는 첫사랑, 그 아련함은 어느새 온데 간데 없고, 이렇게 각박한 현실 속에서 나는 배 나온 아저씨가 되어 가고 있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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