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은 태어나서 살면서 오감으로 인지하는 모든 것 - 눈으로 본 것, 코로 맡은 냄새, 귀로 들은 소리, 입으로 말하고 맛본 것, 온몸의 촉감으로 느낀 것 - 을 마음에 담아놓습니다. 자기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한 순간도 쉬지 않고 마음에 더하기하고 있습니다. 고향 시절의 어떤 사연을 곰곰이 생각해 보면 그 일이 일어났던 현장의 모습과 그 일과 관련이 있는 사람, 당사자인 나의 모습. 그리고 그 때의 감정이나 느낌까지 생생하게 떠오릅니다. 초등학교 시절의 사연도, 중고등학교 시절의 사연도 마찬가지로 떠오릅니다. 이렇게 지금까지 살아온 모든 것들 - 세상, 인연, 사연, 장소, 추구했던 부귀공명(富貴功名) - 과 함께 희로애락(喜怒哀樂)과 애오욕(愛惡慾) 등 온갖 감정이 모두 마음에 저장되어있습니다. 이렇게 끊임없이 마음에 더하기하면서 살아왔고 지금 이 순간은 물론 앞으로도 계속 더하기할 것입니다. 이렇게 마음에 담아놓은 것이 스트레스가 되고 기혈을 막아서 건강을 해치기도 합니다. 세월이 흐를수록 더 많은 것들을 마음에 담아놓고 있어 기혈이 잔뜩 막혀서 몸과 마음이 굳습니다. 어린이가 어른보다 몸과 마음이 유연한 이유입니다.
사람은 오감으로 세상과 사상을 인지하는 순간 인지한 사상과 함께 인지한 세상 속에 있습니다. 인지하여 마음에 담아놓은 것은 모두 실체가 아닌 허상입니다. 따라서 사람은 실재하는 세상에 살지 않고 허상 세상에 살고 있습니다. 이것이 문제이어서 종교에서도 마음을 비우라고 하였고 동서고금의 수행 방법도 모두 마음을 버리고 비우는 데 두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살면서 더하기해 놓은 것들을 빼기하는 데 집중하고 있습니다.
살면서 신앙생활도 해보고 여러 수행도 해보았지만 어느 것도 마음의 문제를 해결해주지는 못하였습니다. 사랑과 자비를 베풀어야 한다고 하지만 미워하는 마음을 어쩌지 못하여 누군가 미운 사람이 늘 있었습니다. 내 마음에 미움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항상 부러움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내 마음에 욕심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성(異性)을 보면 일어나는 마음이 있었습니다. 마음에 색욕이 자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노(怒)하는 마음이 있어서 화를 내고, 이기심이 있어서 자기만 챙기고 살았습니다. 내 안에 있는 마음 어느 하나도 해결하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니 성현들이 말한 삶의 지침을 하나도 지키지 못하고 ‘어차피 사람은 그렇게 살 수 없다’고 포기하고 체념하고 살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한 마음을 어쩌지 못하다가 마음 빼기하는 방법을 만났습니다. 살면서 더하기해 놓은 것들을 하나하나 빼기를 하니 신기하게도 마음이 빠져나가는 것이었습니다. 미워하는 마음이 빠져나가니 미워할 수가 없어 서로 사랑하며 살게 되고, 이기심이 빠져나가니 비로소 이웃을 사랑하게 되고, 욕심이 빠져나가니 탐을 내거나 부러워하는 일이 없어 도둑질하라고 해도 도둑질을 할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색욕이 빠져나가니 이성이 이성으로 보이지 않아 동하는 마음이 없어졌습니다. 이런저런 인간마음이 다 빠져나가니 인간마음에서 가졌던 희로애락을 넘어서고 일체의 관념을 벗어나서 그 무엇에도 매임이 없고 막힘과 걸림이 없이 자유로워지고 더하기 해 놓은 마음에 가려 있던 지혜가 드러나 세상의 온갖 원리를 깨치고 어렵기만 하던 경전의 참뜻이 그냥 알아지고 무한대 우주마음이 되니 분주함이 없이 항상 여여하고 즐거움과 행복하기만한 존재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인간마음으로는 인간 한평생을 살지만 우주마음이 되니 우주 한평생을 살게 되었습니다. 우주는 영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