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 참전용사 모국방문을 다녀와
글: 김연숙(예비역 대위, 재향 군인회 독일지회 여군부회장)
6. 25참전용사 모국방문 행사에 다녀 온지 1년이 지난 시기에 당시 느꼈던 생각과 소감을 정리한다는 것이 참 쉽지 않다. 그러나 지우고 싶어도 지워 지지 않고 더 가슴 아프게 머리를 짓누르는 슬픈 역사로 뇌리에 새겨진 “6.25”..
모국방문행사를 마치고 독일로 돌아와 '마지막이 될지도 모를 한국방문이었 다'는 생각과
해외에 거주하는 6.25참전용사들을 초청하여 참전용사의 아픔을 달래 준 모국 과 재향군인회의 마음 씀씀이에 고마움을 글로 남기고 싶었다. 아직도 생생한 그때 감동적인 순간들,, 차일피일 미루다가 서툰 글이나마 이 제 써 보기로 했다.
1950년 6월25일, 육이오 전쟁이 일어나던 그날,
나는 세브란스 고등간호학교 3학년에 재학 중이었다.
밤번 근무를 하면서 잠시 눈을 부치고 있는데 "밤번 근무 전원집합!"이라는 지시가 내려왔다.
이런 다급한 지시는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다’는 것을 직감 할 수 있었다.
나는 동료들과 함께 여의도에 있는 수도육군병원 구호반으로 급히 나가게 되 었다.
그러던 사이 자신 있게 서울을 사수하겠다던 대통령도 남으로 피난을 가고
끊겨진 한강다리는 나를 더 이상 학교로 돌아가지 못하게 했으며 계속하여 수도육군병원에 눌러 앉게 했다.
그때부터 나는 군대 종군간호원으로 근무하게 되었고 부산으로 이동한 제 5육군병원 동래온천분원에서 계속 근무를 하게 되었다. 그러던 중 1950년 9월 1일부로 육군소위로 임관(현직임관)하게 되었으며 정전협정이 체결된 1953년 7월 까지 육군대위로 군에 복무하였다.
작년 5월 6일자 교민언론에 “6.25참전용사모국방문자 모집”이라는 기사를 보고
재향군인회 독일지회 유상근 사무처장에게 전화해 필요한 구비서류가 무엇인가? 를 확인하고 참가신청서를 제출하였다. 신청 6주 만에 비행기 표를 구입하라는 통지를 받았다. 유 사무처장 안내로 독일에서 참석하는 인원이 3명이었으나 개인사정에 의해 신청했던 한 사람이 못가게 되고 프랑크푸르트에서 1명, 아헨지역에서 본인 1 명이 참가하게 되었음을 알게 되었다.
기대와 설레임으로 6월21일 비행기에 몸을 싣고 한국으로 향했다.
6월 22일 서울 장충동에 있는 그랜드엠버서더 호텔로 가 짐을 풀고 밤은 미국에서 온 육군 예비역중위 이복순과 같은 방을 사용할 수 있도록 배정받았다. 저녁이 되자, 행사일정에 대한 설명과 명찰을 받고 참전용사 40명이 오기로 했으나, 33명만이 한국에 왔음을 알았고
저녁 뷔페로 4박 5일 모국방문 일정이 시작 되었다.
이틑날 새벽 호텔을 떠나 판문점 투어에 나섰다.
'아! 이것이 분단 조국의 현실인가?' 분단의 아픔이 뼈저리게 느껴져 온다.
오는 길에 유명한 임진강 이북에 위치한 통일촌 장단콩 마을에서 생산되는 특산물인 두부와 함께 점심식사를 했다. 이어 지난 78년에 발견된 제 3땅굴에도 갔다. 섬뜩한 땅굴 탐방을 마치고 군사분계선 최북단에 위치, 손에 잡힐 듯히 북한을 볼 수 있는 도라전망대를 들러 보았다.
6월24일에는 광화문 이순신장군상과 세종대왕상 사이의 지하공간에 설치되어 있는 전시관을 방문했다. 처음 보는 이 지하 전시공간에서는 세종대왕 및 이순신장군의 업적 등에 대한 많은 전시품들을 볼 수 있었다.
계속해서 청와대 차창관광을 했으며 오후에는 전쟁기념관을 관람했다.
저녁에는 롯데호텔에서 보훈청장의 초대로 리셉션이 열렸는데 이 자리에는 세계각국에서 초대된 6.25참전용사부부들이 참석했다.
6월25일 아침을 먹은 후, 국가나 민족을 위해 목숨을 바친 영령들이 안장되어 있는 국립묘지로 이동했다. 묘지참배와 헌화, 분향이 백선엽장군(참전전우회장), 재외동포 참전용사대표 들이 참석하여 차례로 이루어졌다.
이어 조국을 위해 산화한 영령들의 명복을 기원하기 위해 재향군인회가 국립묘지에 헌납한 호국종 타종이 14명(회장, 육군대표 백선엽장군, 해군대표 이성호 제독, 공군대표 김창규장 군, 해병대대표 이병문장군, 정진태 현충원장, 6.25회장, 이학준 참전용사 재외동포대표, 이동배 미북서부대표, 김일수 카나다대표, 김동엽 호주대표, 김연숙 독일대표(육간), 이종천 뉴질랜드 대표)에 의해 국립묘지 안에 울려 퍼졌다.
이어 전쟁기념관 평화의 광장에서 열린 6.25전쟁 제61주년 기념식에 참석했다.
이 날 김황식 국무총리를 비롯한 정부 주요 인사, 정당대표, 6.25전쟁 참전유 공자와 유엔국 참전용사 등 약 4000명이 참석했다. 기념식은 61년 전, 그 참혹했던 장면을 다시 한번 떠올리게 하면서 참석자들의 눈시울을 적셨다. '무엇이 진정으로 민족을 위한 길인지 직시하고 한반도의 평화와 미래를 향해 주저 없이 나서야한다'는 국무총리의 기념사가 아직도 기억에 남아있다.
오후에는 정동극장으로 갔다. 예전 분위기가 어땠는지는 기억이 잘 나진 않지 만... 깔끔하고 세련된 분위기를 느낄 수 있었다. 미소라는 공연은 국악을 즐길 수 있는 행복한 시간 이었는데 관람객 가운데 국악에 흥미를 가진 많은 외국인들도 눈에 띠었다.
마지막 날인 6월26일에는 한국 민속촌 방문이 예정되어 있었으나 쏱아지는 비로 많은 분들이 포기를 했다. 무심한 비는 당시 우리 민족의 서러움을 다시 한 번 말해주는 냥 행사기간 동안 하루도 쉴새 없이 줄곧 내렸다.
6.25 전쟁이 일어난지 62년이란 세월이 지났다.
글을 써 내려가는 오늘도 너무나도 생생한 당시의 일들이 되살아난다.
동란이 발발하고 석 달 뒤인 9.28 수복으로 서울을 다시 되찾았다가 그 다음 해 1.4후퇴라는 또 한 번의 피난행렬,
이런 원치 않았던 민족상잔의 과정에서 우리 민족들은 인내와 용기, 어떤 어려운 처지에서도 이겨낼 수 있는 자신감을 익히게 되었는 지도 모르겠다.
전쟁이 끝난 후(사실은 정전이지만)에도 전쟁의 후유증은 계속되었다. 끔찍했던 일들이 한두가지가 아니다. 전쟁이 남기고 간 폭탄, 지뢰를 가지고 놀던 아이들이 포탄이 터지는 바람에 한꺼번에 생명을 잃은 일들이 병원에 실려오는사람들을 통해 목격되었다. 이런 일들은 전 국토 여기저기서 생겨났다.
나는 6.25 참전용사로 4박 5일 동안 모국에서 분에 넘치는 대접을 받고 왔다.
세월이 흘러 내가 독일에 온지도 벌써 46년이란 시간이 흘렀다.
우리 민족에게 또 나 개인에게도 엄청난 변화를 가져다 준 사건 "6.25 전쟁".
이제 반세기를 넘어 60년이 넘는 세월이 지났다. 어찌 우리가 이날을 잊을 수 있을까?
6.25 라는 사건을 모르는 분들이 사회의 주역으로 활동하는 세대에 우리는 살 고 있다.
나라를 위한 참전용사들의 거룩한 희생이 있었던 일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이 끔찍하고 잔인했던 6.25 전쟁은 우리 세대들의 고통에 그쳐야만 하며
다시는 동족끼리 총부리를 마주하는 전쟁이 일어나지 않아야만 한다. 아직도 전쟁은 끝나지 않았다.
남북통일이 되는 날, 아마도 이 전쟁은 막을 내릴 것이다.
언제쯤 남과 북이 통일 될 것인가? 그날을 목이 메어 기다려 본다.
그리고 이름 없이 사라진 영혼들의 명복을 다시 한 번 빌어본다.
<추가 부분>
독일지회 회원은 상호간의 친목을 도모하고 조국의 독립과 그 동안 외세나 모든 침략세력들로부터 자유수호에 공헌함으로서 조국을 지키낸 전역군인 모두가 참여하실 수 있습니다.
독일지회는 창립이후 지난 3년간 한국의 안보현실을 한인사회에 올바르게 알리는데에도 노력해 왔습니다.
향군회원은 평생 1회 15유로(종신회비 1회로 종결)만 납부하시면 향군회원증을
교부받으시게 되며 고국방문시, 각종혜택(예, 공공시설 방문무료, 교통비 무료 등)도 누리실 수 있습니다.
또한 향군 독일 지회에서는 지회 발전을 위해 회원이나 임원으로 함께 수고 하실 여성회원
들도 찾습니다. 향군 회원 여러분의 많은 동참을 바랍니다.
정리: 독일중부 유로저널 김형렬 지사장 (hlk1951@hot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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