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날의 나는 ‘나는 왜 이렇게 밖에 살지 못할까?’ 혹은 ‘나는 왜 남처럼 ㅇㅇ하지 못할까?'하는 불만과 의문이 끊임없이 일어났습니다. 이러한 불만은 '성격을 개조할 수는 없을까?’라는 의문으로 이어졌고 ‘운명이라는 게 있는 것일까?’ 그리고 ‘운명은 바꿀 수 없는 것인가?’하고 생각하기에 이르고 현재까지의 ‘나’로부터 벗어나 다른 ‘나’가 되고 싶어 했습니다. 그래서 이런저런 철학서적도 읽어보고 성공했다는 사람의 강연에도 쫓아다니기도 하면서 마음을 굳게 먹고 달라지려고 노력도 해 보았지만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어떤 때는 작은 습관하나 고쳐보자고 마음먹어보지만 그것도 여의치 않았습니다. 그러한 노력은 대개 실패로 끝났고 ‘세 살 버릇 여든까지 간다’ 혹은 ‘작심삼일(作心三日)’이라는 말이 우리 선조들의 지혜가 결집된 기가 막히는 말이구나 하면서 자위하고 포기하였습니다.
옛날의 나는 부모님이 주신 삶의 지침(가풍, 가훈) 대로 살지 못하고 학교에서 배운 대로, 신앙의 말씀대로 살지 못하는 ‘나’를 미워하기도 하고 스스로 한심해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리고 왜 그렇게 살지 못할까 자문도 해보고 영성이 깊은 사람을 찾아다니며 상담을 하면 늘 답은 같았습니다. ‘어차피 사람은 그렇게 살 수 없습니다. 그렇게 살기 위해 죽을 때까지 노력하고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면서 선행을 하면 됩니다’ 그런가 하고 지내다가 또 스스로 못마땅하여 다시 그럴싸한 사람을 찾아가 상담을 하면 늘 같은 답이 되돌아왔습니다. 왜 실행할 수도 없는 것을 이렇게 살라 저렇게 살라고 하였을까? 헛소리를 한 것인가?
옛날의 나는 신앙인이 전보다 많이 늘어나는데도 왜 세상은 더 혼탁해 지고 어지러워지는지 그 이유를 알지 못하여 가슴이 답답하였습니다. 그리고 고결(高潔)한 일을 하는 사람들이 왜 악행을 저질러서 세상을 놀라게 하고 사람들을 실망시킬까? 사람들은 마귀가 씌어서 그랬다고 하지만 납득할 수가 없었습니다.
옛날의 나는 ‘나’가 누구인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도무지 알지를 못하였습니다. 소크라테스가 ‘너 자신을 알라’라는 명제를 던진 지 이천년이 훨씬 지났는데도 ‘나’라는 존재가 누구인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아직도 오리무중(五里霧中)을 헤매고 있습니다. 철학도 종교도 과학도 어느 것 하나 속 시원한 답을 내어놓지 못하고 있습니다.
옛날의 나는 삶의 의의와 가치를 몰랐습니다. 어느 가문에 태어나서 학교교육 받고 직장 얻어서 밥벌이하고 배우자 만나서 가정을 이루고 아들 딸 낳고 짓고 부수며 살다가 죽는 것이 사는 것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냥 불이 좋아서 불꽃 주위를 동심원을 그리면서 맴돌다가 결국 불에 타죽는 불 나방이와 조금도 다르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삶의 의문이 인간마음을 빼기하고 나니 다 풀리고 다 해결되었습니다. 태어나 살면서 더하기해 놓은 인간마음은 바르지 못하여 바른 삶을 못 살게 하고, 인간마음이 진리를 가리고 있어서 세상의 근본과 나의 근본을 알 수 없고, 인간마음은 어두워서 삶의 의의와 가치를 알지 못하게 합니다. 그러나 문제가 있는 인간마음을 다 빼고 나면 세상의 근본인 가장 크고 높고 넓고 낮은 우주마음이 되어 일체를 다 아는 대지혜의 존재가 되어 세상과 세상이치를 다 알아 일체의 의문의심이 다 풀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