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말이었던 지난 토요일(8일) 태어나서 처음으로 대선 투표를 했다.
지금 내 나이를 감안한다면 이제서야 생애 첫 대선 투표를 했다는 게 이렇게 공개적으로 언급하기에 너무나 부끄러울 따름이다.
지난 2007년 대선이야 어차피 영국에 있었고 투표할 방법도 없었으니 그렇다 해도, 적어도 지난 2002년 대선만큼은 얼마든지 투표권을 행사할 수 있었건만, 나는 그날 잘난 토플시험을 치른다는 알량한 핑계로 투표를 하지 않았고, 저녁에는 친구들과 만나 아무 생각 없이 놀았다.
그때는 정말 몰랐다, 그 투표권이 얼마나 소중한 권리이자 의무인지를. 그 투표권이 모여서 세상을 변화시키는 힘이 된다는 사실을.
사실, 영국에 오기 전 한국에서 살 때만 해도, 아니 어쩌면 영국에 와서도 초창기 유학생 시절만 해도 나는 정치에 정말 관심이 없는 사람이었다.
어차피 잘 모르는 사람들(정치인들)의 잘 모르는 일들(정치)이니, 왠지 나와는 상관 없는 것처럼 여겨졌고, 굳이 내가 정치에 관심을 갖지 않아도, 굳이 나 한 사람 투표하지 않아도, 어차피 별다른 변화는 없을 것이라고 여겼다.
너무나 한심하고 부끄럽지만, 그 시절 나는 정말 그랬었다.
그것은 아마도 내가 살아가는 세상, 또 내가 앞으로 살아가게 될 세상에 대해 너무나 막연하게 생각했기에, 내게 지워진 인생의 무게와 책임을 실감하지 못했었기에 그랬을 것이다.
그러다가 언론 공부를 하면서 세상에 좀 더 관심을 갖게 되고, 어떤 사람들에 의해 어떤 일들이 일어나고 있는지를 알게 되면서, 내가 예상했던 것 이상으로 세상이 심각하게 잘못 돌아가고 있다는 것을 깨닫고서, 서서히 정치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그리고, 내가 헤쳐나가야 하는 세상의 무게와 내게 지워진 책임을 실감하면서, 그렇다면 그 세상을 더 나은 방향으로 바꾸기 위해서는 뭐라도 해야 한다는 절박한 의식이 생겨났다.
어쩌면 나처럼 정치에 별 관심 없던 이들조차 정치에 관심을 갖게 만들고,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문제 의식을 느끼게 하고, 나아가서 투표권이라도 행사해서 그 정치를 바꾸어야 한다고 결심하게 만든 데는 인터넷이 큰 역할을 한 것 같다.
보수 언론들이나 정권이 장악한 공영 방송들이 절대 알려주지 않는, 그러나 엄연한 사실인 수 많은 일들을 접할 수 있었던 것은 순전히 인터넷 덕분이었으니까.
상식적으로 납득이 되지 않는 일들이 버젓이 일어나고, 또 그것들이 제도화되고 구조화되려는 현실 앞에서 정치에 직접 참여하지 않는 이상 우리들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최소한 소중한 투표권만이라도 행사하는 것뿐이었다.
이제 이렇게 외국에 살면서도 아주 간단한 노력만 기울이면 당당히 투표권을 행사할 수 있게 되었으니, 그야말로 세상 참 좋아진 것 같다.
그렇게 비장함과 부푼 마음을 동시에 안고서 재외투표소가 마련된 주영한국대사관을 찾았다.
그 동안 이번 대선에 투표하기 위한 절차인 선거인 등록을 마친 이들이 그렇게 많지 않았다는 얘기를 들어왔던 터라, 과연 얼마나 많은 이들이 이번 대선에 투표할까 궁금하기도 했었다.
막상 투표장에 가 보니 생각보다 투표하러 온 사람들이 참 많았고, 특히 젊은이들이 참 많아서 놀랍기도 하고 흐뭇하기도 했다.
딱 봐도 20대 초반 정도로 보이는 유학생 같은 젊은이들이 친구들과 함께 무리 지어 투표를 하러 왔고, 투표소 앞에서 발랄하게(?) 기념 촬영도 하고 있었다.
그 광경을 보고서 나 역시 기념(?) 사진 한 방 박았다.
일부 기성 세대들은 요즘 젊은이들이 아무 생각이 없고, 정치에도 관심이 없다고 하지만, 이번 대선 투표장에서 본 요즘 젊은이들은 전혀 그렇지 않아 보였다.
소중한 투표권을 행사하면서 심지어 그것을 즐기는 듯한 모습에서, 이역만리 타국 땅에서도 조국의 미래를 생각하는 그들의 마음이 멋져 보였다.
나는 다행히 주영한국대사관이 위치한 런던 시내와 가까운 곳에 살아서 투표하러 나선 길이 전혀 어렵거나 귀찮지 않았지만, 듣기로는 런던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사는 이들, 하루 혹은 심지어 1박 2일을 투자해야 투표를 할 수 있는 이들도 여럿 있었다고 하니 더더욱 그들의 소중한 투표권 행사가 아름다워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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