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상박사(81)는 개성에서 출생해 당시 6년제인 개성중학교를 다니던 중 6.25를 만났다. 18세의 나이에 미 보병 25사단 예하 35연대 군속으로 종군하면서 가족과 헤어진 것이 오늘에 이른다. 김씨는 서울공대를 졸업한 후1958년 유학길에 올랐다.
독일 하노버 공대(석사)와 슈투트가르트 공대에서 기계공학을 전공(공학박사)했다. 김박사는 MAN회사, Hoechst 화학회사 등 독일 유명 기업에서 연구원으로 재직했으며 1994년 정년 퇴직했다. 그는 재독한국과학기술자협회장, 프랑크푸르트 한국문화회관 대표를 역임했고, 현재 거주지인 하터스하임(Hattersheim)의 외국인 후원정책팀 고문직을 맡아보고 있다.
독일인 아내와 슬하에 두 아들이 있다. 이 기행문은 일기형식으로 꾸며졌으며 독자의 이해를 돕기 위해 사실을 왜곡하지 않는 범위 내에서 취재기자(김운경)가 정리했다. 김영상박사의 북한방문기는 이번 호를 시작으로 앞으로 약 7회 연재될 예정이다.
김영상씨와 부인
나는 2012년 5월 3일부터 15일까지 아내와 함께 북한을 방문했다. 이번 여행은 나에게는 세번 째이며 아내도 두번 째 방문이었다. 여행상품은 프랑크푸르트 인근 쾨니히슈타인소재 독일여행사 IKARUS 가 기획했으며 여행팀은 우리 부부를 비롯해 열 명의 독일인과 오스트리아 부부 등 모두 14명으로 구성됐다.
나의 첫번 째 북한방문은 1998년 5월, 북한과 독일간 제약회사 합작 추진을 위해 독일제약회사의 의뢰를 받아 업무차 간 것이었고, 두번째 방문은 6.25때 헤어져 생사도 확인되지 않았던 가족이 북한에 살고 있다는 소식을 53년만에 접하고 가족을 만나기 위해 다녀왔다. 이때 아내도 나를 따라 나섰다.
2012년 북한도 그 사이 많이 변하고 있었다. 9년만에 다시 찾은 고향, 북한방문기를 일기형식으로 기록해본다.
2012년5월3일(목)
베이징으로 출발
오후 5시에 프랑크푸르트 비행장으로 나갔다. 여행사 IKARUS 는 따로 가이드를 붙이지 않았다. 우리까지 합쳐 14명이라는데 누가 누군지 알수 없었다. 북한에 들어가면 그 곳 여행사가 모든 안내를 맡아서 하므로 독일여행사가 가이드를 끼워 보내면 비용만 더 들 뿐 효과가 없다고 했다.
우리는 저녁 8시 정각, AIR CHINA 편으로 베이징을 향해 출발했다. 9시간이 넘는 장거리 비행인데 좌석간 간격이 좁아 불편했고 기내 써비스도 아직 수준급에 이르지 못했다.
2012년5월4일(금)
점심 무렵 베이징에 도착했다. IKARUS 지사에서 안내자가 비행장으로 마중나와 명단을 확인하면서 북한여행을 함께 할 일행을 알게 되었다. 평양행 비행기로 갈아타기 위해 북경에서 하루를 유숙해야 했다. 북경과 독일과의 시차는 6시간, 독일보다 6시간이 앞선다.
2012년5월5일(토)
오전 9시 베이징 국제공항. 북한 고려항공 데스크에서 탑승수속을 밟는데 무려 1시간 반이 걸렸다. 줄지어 선 여행객들은 이제나 저제나 차례를 기다리고 있는데 화물들이 끊임없이 운송벨트를 타고 비행기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 보였다. 사람보다 짐이 우선권이 있나보다. 포장이 모두 똑 같은 것으로 봐서 개인이 아니라 북한정부나 기관에서 무언가를 대량 구입한 물건이 아닌가 싶었다. 한 여행자의 설명에 따르면 평양행 비행기마다 이렇게 짐으로 가득찬다고 했다.
마침내 내 차례가 되었다. 조선족인 공항직원이 내 여권을 열번은 열어 보는 것 같았다. 한국사람이 독일여권을 가지고 있으니 어찌 처리해야 좋을지 판단을 못하겠는지 그는 결국 안쪽에 있는 고려항공 매니저인듯한 여성에게로 갔다. 두 사람은 한참 동안 속삭이듯 말을 주고 받았다. 북한 여성은 간간히 옆 눈으로 내 쪽을 슬금슬금 살펴보기도 했다. 그리곤 어디론가 핸드폰으로 전화를 했다. 다소 격앙된 목소리로 10여 분간 전화하면서 흘깃흘깃 우리쪽을 쳐다보았다. 그러고 나서야 탑승 허가가 나왔다. 나 때문에 탑승수속이 20분정도 지체되어 뒤에서 기다리는 사람들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북한에 입국하기도 전에 북경 공항부터 탑승문제가 불거져 기분이 썩 좋지 않았다.
고려항공사가 보유한 여객기는 러시아에서 제작한 일류신 기종이다. 2003년 방문할 때 탔던 비행기는 많이 낡았다. 창밖으로 여객기 날개 여기 저기에 새로 박아넣은 듯한 나사들이 보였다. 그걸 보자 슬며시 불안감이 들었었다. 그런데 이번에 탄 비행기는 새 비행기 같았다. 여객기 내부도 비교적 깨끗했다. 하지만 좌석간 간격이 너무 좁고 시트도 딱딱해 불편했다. 탑승객은 4분의 3 이상이 북한 장교 또는 외교관들이었고 외국인은 우리 일행과 국제원조기구 관계자들이 전부였다. 북한인들은 너무 소란스러웠다. 기내 에티켓을 무시하고 저희들끼리 마구 떠들어대 국제시민으로서의 자질을 의심케했다.
북경에서 평양까지 비행시간은 약 90분. 비행기가 이륙하자마자 음료수와 따뜻한 점심이 나왔다. 계란후라이와 굴라쉬 등 서양식이어서 깜짝 놀랐다. 1998년과 2003년만해도 기내 식사는 없었고 기껏해야 싸구려 카라멜이나 사탕이 전부였기 때문이었다. 고려항공 승무원의 써비스도 많이 개선됐다. 전에는 군인처럼 딱딱하고 뻣뻣한 모습이었는데 지금은 과거와 달리 상당히 친절해졌다. 하지만 어딘지 모르게 매우 어색해보였으며, 전반적으로는 여전히 국제수준에는 미치지 못했다.
오후 2시45분에 평양에 도착했다. 평양국제공항은 2003년 내가 다녀간 후 보수한 것 같다. 또 일부 시설은 확장되었다. 공항에는 10대 정도의 비행기가 있었다. 흡사 독일의 시골 비행장 모습이었다.
비행기 트랩을 내려와 짐을 찾는데 한참을 기다려야 했다. 컨베이어에는 주인이없는 큰 짐들만 끊임없는 올라왔다. 약40분정도 지나서 비로소 승객들의 짐이 나오기 시작했다. 공항 세관에서 외국인들은 모두 핸드폰을 강제로 맡겨야했다. 나도 핸드폰을 내주고 보관증을 받았다. 북한을 떠날 때 다시 주겠다고 한다.
맨 좌측 안내인 K씨, 오른쪽에서 두번째가 안내인 O씨
공항 출구에서 KITC(고려국제관광여행사) 직원 두 명이 독일 여행사 IKARUS 피켓을 들고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책임 안내자는 40대 초로 보이는 K 씨였고 다른 한 사람은 30대 여성 O씨. 공산당원인 K씨는 의사 부인과 두 아이를 둔 단란한 가정의 가장이었다. 4년전부터 외국관광객 안내원으로 일하고 있다고 했다. 안내원 직업에 만족스럽다는 그는 다소 경직된 듯 보였지만 외국인에게 좋은 인상을 주려고 애쓰는 것 같았다. 북한에서 관광안내인은 외화와 외국상품을 접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지는 만큼 인기가 있지만 원한다고 누구나 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K씨에 비해 매우 활달하며 감추지 않고 터놓고 말하는 타입인 O씨도 자녀가 둘이 있었다. 하지만 남편은 1년 전 교통사고로 죽었다고 한다. 독일어 번역을 전공한 그녀는 현재 북한 출판사에 근무하고 있는데 이번에 K씨를 도와 우리 일행의 안내를 맡았다고 했다. O씨는 외국인들과도 스스럼없이 대화하는 등 상당히 개방적인 모습을 보였다. 유럽 여성 못지 않은 자연스러운 행동에 오히려 내가 놀랐다.
대부분 북한 여행인 처음인 우리 일행은 호기심에 가득차 너나 할 것 없이 카메라를 꺼내 보이는대 로 촬영을 해대기 시작했다. 그리고 K로부터 첫 경고를 받았다: "경찰과 군인은 절대로 찍지 마십시오!"
일행이 묵은 평양 호텔과 대동강
평양 시내
호텔에서 본 평양 시내
330m 평양 류경 호텔
<다음 호에 계속~>
글/사진: 김영상박사
정리: 유로저널 프랑크푸르트 김운경
woonkk@hot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