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로저널 단독보도 재독동포 김영상박사 북한방문기 (2)
60년만에 다시 찾은 내 고향 북녁땅
김영상박사(81)는 개성에서 출생해 당시 6년제인 개성중학교를 다니던 중 6.25를 만났다. 18세의 나이에 미 보병 25사단 예하 35연대 군속으로 종군하면서 가족과 헤어진 것이 오늘에 이른다. 김씨는 서울공대를 졸업한 후1958년 유학길에 올랐다. 독일 하노버 공대(석사)와 슈투트가르트 공대에서 기계공학을 전공(공학박사)했다. 김박사는 MAN회사, Hoechst 화학회사 등 독일 유명 기업에서 연구원으로 재직했으며 1994년 정년 퇴직했다. 그는 재독한국과학기술자협회장, 프랑크푸르트 한국문화회관 대표를 역임했고, 현재 거주지인 하터스하임(Hattersheim)의 외국인 후원정책팀 고문직을 맡아보고 있다. 독일인 아내 사이에 두 아들을 두었다. 이 기행문은 일기형식으로 꾸며졌으며 독자의 이해를 돕기 위해 사실을 왜곡하지 않는 범위 내에서 취재기자(김운경)가 정리했다.
김영상 박사 내외
2012년5월5일(토)
평양 도착
버스로 평양국제공항을 출발해 약 1시간 달린 후 평양 시내로 들어왔다. 공항에서 시내로 가는 고속도로 상태는 비교적 양호했다. 그런데 놀랍게도 과거와 달리 오고가는 차량들이 많았다. 2003년만 해도 도로는 거의 비어있었다. 우리가 묵게될 호텔은 평양 중심가에 있는 46층 짜리 ‘양강도’ 국제호텔이었다. 호텔의 시설과 써비스는 구라파의 일류호텔에 버금갔다. 호텔 앞 넓은 광장에는 15대 이상의 대형버스와 수십대의 승용차가 주차하고있었다. 이 역시 2003년과는 비교도 될 수 없을 만큼 변한 모습이었다. 9년 전에는 외국관광객들을 전혀 볼 수 없었으며 호텔도 텅텅 비어있었다. 특히 놀란 것은 호텔방에서 독일에 직접 전화를 걸 수 있었던 점이다. TV 를 틀어보니 중국과 일본 그리고 영국의 BBC 방송이 나왔다. 아, 그동안 북한도 많이 변했구나. 2003년엔 일류급 호텔에서 조차 별도로 설치된 전화교환소를 통해서만 외국에 전화할 수 있었고 룸에서 외국 TV방송을 시청하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었다.
짐을 푼 우리 일행은 대기실에 모여 다음날 일정에 대해 가이드의 설명을 듣고 저녁식사를 하기 위해 식당으로 갔다. 식사는 한식이었다. 깨끗하고 시원한 물김치가 나왔으며 외국인들을 위한 서양음식도 입맛에 맞게 적당히 요리되어 모두 잘 먹었다. 평양에서의 첫날 밤은 다음날부터 이어질 여행에 대한 기대 때문인 듯 다소 설레는 마음으로 그러나 불편함 없이 보냈다.
대동강 보트장
북한에 도착한 후 여행안내인 K와 O는 우리 일행에게 북한에 대한 일반적인 정보를 프리젠테이션했다. 그 설명에 따르면 평양은 주민수가 약 2백만명, 인근 위성도시까지 합치면 약 3백만명이다. 차량은 번호판 색깔을 보면 소속을 알 수있는데, 백색은 공산당 차량, 흑색: 군용 및 경찰차량, 황색 : 일반 승용차, 적색: 기업 차량, 청색: 외교관 차량 등으로 분류된다. 북한에서도 자동차가 생산된다. 몇 해 전부터 현대 자동차회사와 북한자동차회사가 공동투자해 평양 인근에 공장을 세우고 3 종의 자동차를 생산하고 있다. 차종은 각각 ‘휘파람’(승용차), ‘뻐꾸기’(SUV 차량), ‘삼천리’(미니 버스)로 명명되었다. 대형버스나 화물차량은 중국에서 수입하는 것 같았다. 평양시내엔 2003년도만 해도 교통신호등이 없었으며, 제복을 입은 젊은 여경찰이 수신호로 교통정리를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도로에 차량이 아주 드물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 말처럼 10 년사이 평양의 거리는 굉장히 달라져 있었다. 통행하는 차량수가 급격히 늘어 시내가 복잡해 보였다. 특히 시내 중심지는 유럽의 여타 도시들처럼 차들이 떼로 밀려 다녔다. 다만 일요일에는 일반 차량의 운행이 금지되는 점이 특이했다. 그 이유를 알고보니 연료 절약과 환경오염방지를 위해서라고 한다.
북한의 외제차량
2012년5월6일(일)
평양 시내 관광
호텔의 조식은 토스트 2조각, 버터 한조각, 쨈, 계란 반숙 2개, 닭튀김 그리고 인스턴트 커피가 나왔다. 닭고기를 빼놓고는 모두 외제였다. 그런데 설탕과 우유는 서빙하는 여성이 테이블마다 돌아다니며 일일이 1인분씩 나누어 주는 것이 아닌가. 물자가 부족한 것이 분명했다.
평양 개선문
식사후 우리는 평양시내 관광에 나섰다. 처음 찾아간 곳은 '평양개선문'. 김일성이 2차 세계대전 때 빨치산 부대를 이끌고 일본군을 패퇴시킨 후 평양에 개선한 기념으로 1982년 김일성 칠순 생일을 맞아 세웠다. 파리의 개선문을 모방한 듯 형태가 매우 비슷했다. 크기는 높이 60m, 폭 50m로 파리 개선문보다 좀 더 크다. 우리는 이어서 '김일성광장'의 '주체탑'을 보았다. 주체탑이란 김일성의 주체사상을 상징하는 높이 170m의 탑으로 1982년에 건설했으며 밤에는 탑 꼭대기 불꽃을 조명으로 밝혀 시내 멀리서도 볼 수 있게 했다. 다음으로 노동당 창립기념탑을 방문했다. 1995년에 건설된 이 탑은 높이 약 70m, 대형 망치와 낫, 붓으로 구성되었는데 이것은 북한의 노동자와 농부, 지식인을 나타내는 것이라고 한다. 그리고 '천리마'도 보았다. 천리마(높이 46m)는 북한사회의 빠른 발전을 염원하는 상징물로 1961년에 세워졌다.
북한 여대생. 짧은 치마에 굽 높은 구두가 유행이다
평양 시내 보통문
오전 중에 방문한 명소는 모두 김일성과 노동당을 찬양하는 건조물들로 북한을 찾는 외국인 관광객들이 반드시 방문해야 하는 관광코스다. 각 장소마다 한복을 차려입은 여성이 안내하는데 이들의 설명은 수 십년동안 같은 일을 수 천번 반복해서 그런지 마치 기계와도 같았다.
점심시간이 되자 K가 시내의 한 작은 식당으로 데리고 갔다. 점심 메뉴로 돼지고기, 두부, 면 등이 들어간 매운 맛의 전골요리가 나왔다. 테이블 위에서 직접 가스불로 끓여 먹도록 준비되었다. 맵지만 감칠맛이 있어서 독일인들도 얼굴이 벌개지면서도 잘들 먹었다. 2003년에 방문했을 때는 이같은 작은 음식점은 보지도 못했다. 아마 있었다고 해도 외국인들이 들어가지는 못했을 거다. 그때는 항상 큰 호텔에서만 식사를 했다.
식사 후에도 관광이 계속되었다. 먼저 '항일혁명영웅묘지'를 방문해 참배했다. 이 묘지는 일본군에 대항에 투쟁했던 빨치산 영웅들의 동상으로 가득 채워져 있었다. 세어보니 모두 134기였으며 그 가운데 3명의 여성이 있었다. 김일성의 모친과 김일성의 첫번째 아내 김정숙 그리고 어떤 장군의 아내였다.
묘향산 가는 길
시내 관광을 마친 우리는 오후4시에 묘향산을 향해 출발했다. 묘향산은 평양에서 약 200 km 정도의 거리에 있다. 도중에 타조농장에 들렀다. 약20여년전에 인민의 식량보충을 위해 타조농장을 건설하라는 김일성 주석의 지시에 따라 이 농장을 조성했다고 한다. 이것을 찬양하는 엄청 큰 안내판이 농장 입구에 세워져 있었다. 타조농장은 어미 타조들의 사육장과 연령별로 분리된 타조 우리, 도축장 등의 시설을 갖추었다. 약 200 마리의 타조가 있었다.
묘향산 방문은 이번이 두번째다. 1998년 처음 북한을 방문했을 때 다녀 온 일이 있다. 가는 길이 자갈길이어서 승용차로 가는데도 매우 불편했던 것으로 기억된다. 그런데 이번에 보니 도로를 손질한 것 같았다. 자갈길은 없어지고 도로는 양방향 각각 2차선 아스팔트로 포장되었다. 하지만 중앙분리대도 없고 중앙선도 없었다. 관광버스들과 군용트럭이 자주 보였다. 차량들은 차선 개념이 없이 다니고 싶은 대로 다닌다. 게다가 새 도로는 처음부터 끝까지 울퉁불퉁하고 패인 곳이 수도 없이 많았다. 한 여성이 도로 위에 꿇어 앉아 괭이같은 연장으로 구멍을 메우는 작업을 하는 것이 보였다. 우리 버스 운전사도 도로구멍을 피해 좌우로 왔다갔다하며 자주 반대편 차선을 침범하면서 운전했다. 버스는 공처럼 튀어 올랐다가 땅으로 떨어지기를 수 백번, 수 십센티미터나 공중으로 던져졌다가 곤두박치곤 했다. 승객의 엉덩이도 따라 올라갔다가 떨어졌다 하면서 사람들은 그때마다 "아이쿠" 외마디를 질렀다. 나는 한 손으로는 카메라를 움켜 쥐고 다른 한 손으로는 버스 손잡이를 꽉 잡아야 했다. 아내는 급기야 버스의 요동치는 충격을 견디느라 잔뜩 긴장한 탓에 목이 뻣뻣해지면서 두통이 나기 시작했다. 버스는 중국제였는데 운전수의 시트는 특수 스프링 장치가 되어 있어서 험한길을 운전해도 크게 요동치지 않도록 고안됐다. 60년전 화물차에 장착되었던 아코오디언식 스프링이었다. 충격을 완충시키는 효과가 있다. 버스는 시속 60-70km정도를 유지했다. 도로 사정 때문에 더 이상 가속할 수가 없었다.
동원된 주민들
얼마를 더 가니 양쪽 도로변에 넓은 경작지가 펼쳐졌다. 오늘이 일요일인데도 밭에 나와서 일하는 농부들이 많았다. 대부분은 여자였으며 30-50명 단위로 작업하고 있었다. 각 작업단위마다 경계표시로 보이는 빨간색 깃발을 꽂아 놓았다. 밭을 가는 방법은 70년 전 그대로였다. 소에 쟁기를 달아 갈거나 소가 없으면 사람이 직접 밭을 갈았다. 한 여자가 쟁기를 잡고 두 여자가 좌우에서 밧줄을 끌어 당기며 밭을 가는 장면도 목격되었다. 지금 시대에 아직도 원시적인 농사방법으로 밭을 가는구나 생각하니 마음이 언짢아졌다. 멀리 언덕에서 이따금 할머니와 손자가 나물 캐는 모습도 보였다. 또 논은 논대로 바뻤다. 마침 논에 모를 이양하는 시기여서 농부들의 모습이 어느때보다 분주해 보였다. 길가엔 농부들이 타고온 것으로 보이는 수 백대의 자전거들이 빽빽히 세워져 있었다. 논에는 물이 충분히 차 있었다. 묘향산에서 흘러 내려오는 농수로가 상당히 크고 넓었다. 수로는 이미 논에 물을 댄 탓인지 바닥에 자갈과 모래가 보일 정도로 물은 많지 않았다.
<다음 호에 계속~>
타조 목장
글: 김영상박사, 사진: 부인 김일제
정리: 유로저널 프랑크푸르트 김운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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