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을 물질인 몸과 정신작용을 하는 마음으로 볼 때 사람이 사람으로서의 삶을 사는 것은 사람이 가진 마음이 사는 것입니다. 식물인간을 보면 몸에 목숨이 붙어있지만 한 인간으로서 삶을 살지는 못합니다. 옆에 식물 개가 누워있다면 식물인간이나 식물 개나 다를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의식이 돌아와 마음이 활동을 시작하면 식물인간은 울고 웃고 말하면서 비로소 한 인간으로서의 삶을 살게 됩니다. 개도 의식이 돌아오면 주인을 보면 꼬리를 치고 낯선 사람을 보면 멍멍 짖으면서 개의 삶을 살기 시작합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한 인간으로서 사람답게 사는 것은 사람이 가진 마음이 사는 것입니다. 몸은 마음먹은 것을 실행하는 도구입니다.
그런데 사람이 가진 마음이 문제가 있습니다. 사람이 가진 마음은 태어나 살면서 오감(五感)으로 보고 듣고 냄새 맡고 말하고 느낀 것을 감지(感知)하는 순간 사진 찍듯 찍어서 담은 것입니다. 이것이 사람이 가진 마음 세계입니다. 세상(과 만상만물) 자체가 아닌, 세상(과 만상만물)을 찍은 사진이 사람의 마음세계를 이루고 있습니다. 사진을 찍는 순간 마음에 담고 동시에 찍은 사진으로 봅니다. 내가 있는 공간(우주)도 찍어놓은 사진으로 봅니다. 내가 나를 보고 알고 있는 것도 담아놓은 사진과 몸을 보고 찍은 사진을 ‘나’라고 알고 있습니다. 그러니 사람은 세상에 있는 것이 아니고 세상을 찍어놓은 사진 속에 있으며 자기 자신인 ‘나’도 사진입니다. 실제 있는 세상(과 만상만물)과 사진이 겹쳐져 있기 때문에 세상에 있는 줄 착각하고 있을 뿐입니다. 사진은 진짜가 아닙니다. 실제로 있는 것을 찍어놓은 가짜(=허상)입니다. 사람이 태어나서 살았던 것은 끊임없이 찍어 담은 사진세계(마음세계) 속이었습니다. 희노애락(喜怒哀樂)도 오욕(五慾)칠정(七情)탐(貪)진(瞋)치(痴)도 모두 사진세계(마음세계) 속에서의 일입니다. 삶의 사연도 만나고 맺은 인연도 - 살아온 일체가 마음세계 속이었습니다. 또한 마음세계는 가짜이어서 참이 없습니다. 그리고 마음세계는 생명이 없습니다. 몸이 목숨이 붙어있는 동안은 있다가 몸의 목숨이 끊어지면 ‘나’는 허상이어서 없어집니다.
허상은 없는 것입니다. 없는데 있다고 생각해서 있는 것이 ‘나’입니다. 먼저 허상의 ‘나’ 는 끊임없이 세상(과 만상만물)을 오감으로 느낌으로써(찍어 담은 사진으로써) 세상(과 만상만물)이 존재함을 확인하려 하고 또 그 사진 세상에 스스로 존재함을 확인하려 합니다. 그리고 허상의 ‘나’는 무언가를 가지고 이루는 데서 존재의 의의를 찾습니다. 그렇게 하지 않고는 존재감과 자아 상실로 불안하고 허무해서 한 순간도 견디지를 못합니다. 허상이기 때문에 허기(虛氣=虛飢)가 져서 닥치는 대로 그렇게 합니다. 욕심과 집착에 끝이 없습니다. 그러다 보니 욕심과 집착에 사로잡혀서 진리가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습니다.
사람이 불완전한 것은 세상(진리세상)에 살지 못하고 세상을 찍어 담은 사진세계(마음세계=허상세계)에서 사는 허상의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몸이 목숨이 붙어있는 동안에도 허상의 존재는 그 의식이 깨어있지 못하고 죽어있기 때문에 생명이 없습니다(=무덤 속에 있습니다). ‘나’는 몸이 목숨을 다하면 없어지는 존재입니다. 완전한 것은 없어지지 않는 것(세상=진리)이 완전한 것입니다. 허상의 세상인 마음(세계)을 다 빼서 없애고 허상인 나마저 다 없애면 실상인 세상(진리세상)에 실상의 재질(실상의 몸과 마음)로 거듭나 살게 됩니다. 마음빼기를 하여 이와 같이 된 사람들이 수없이 나와 있어 이미 실증(實證)이 된 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