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변정담 (Fireside Chat) 6 - 2
"나는 오직 한가지 밖에 아는 것이 없다. 진실로 행복한 사람은 섬기는 법을 갈구하여 발견한 사람이다." 아프리카의 성자 알버트.슈바이쪄 박사의 말이다.
이제 지난주에 이어서 노자와 예수의 만남의 장소로 가보자, "섬기는 법을 갈구한다?" 참 좋은 이야기이다. 그러나 그것은 그리 쉬운일이 아닌 것 같다. 섬기기를 연구하기 전에 우선 자신의 마음속에 평안이 있어야 한다.
노자는 말한다 "남이 두려워 하는 것이면 나도 두려워 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그러하건마는 나는 세상사람들과의 거리가 아득히멀어서 가이 없구나,
세상의 여러 사람들은 기뻐 웃으면서 소나 양의 맛있는 고기를 즐기는 듯, 봄동산에 올라 조망(view)을 즐기는 듯하건마는 나만은 홀로 텅 빈 가슴으로 평안하고 고요하게 있네, 세속적인 욕망은 낌새조차 보이지 않는 것이, 마치 갓난아이가 웃을 줄도 모르는 것 같구나, 나른하고 고달파서 돌아 갈 곳 없는 사람과도 같네, 여러 사람들은 다 세속적인 욕망에 의욕이 넘치고 있건마는 나만은 홀로 모든 것을 잃어버린 것만 같구나,
나의 마음은 어리석은 사람의 마음인가 세상사람들은 모두 똑똑하고 분명하기만 한데 나는 홀로 흐리고 어둡기만 하네, 세상사람들은 사리에 밝고 빈틈없이 잘 살필 줄 아는데 나만은 홀로 어둡고 어리석기만 하네, 바다처럼 안정되고 고요하며 끝없이 흘러가는 매지 않는 배처럼 구속됨이 없구나, 많은 사람들은 다 쓸모가 있건마는 나만 홀로 남들과 달리 생의 근원을 소중히 여기노라."
노자의 독백이다. 성인도 인간이기에 나약해지는 순간이 있기 마련이고 그 나약함에 정직함으로써 추종자들이 만들려는 "우상"으로 희생되지 않는 법이다. 노자는 남들과 자신을 비교하면서 독백을 전개해 나간다. 그러면서도 자신이 서 있는 자리를 정돈하고 다시 존재의 과녁을 명중시키고 있다.
겟세마네라 이름하는 동산에서 젊은이의 피가 흐르는 예수는 어떠했는가? 그도 고뇌한다. 그는 피와 눈물이 없는 돌이 아니었기에 고통한다.
여우도 들어가 쉴 굴이 있고 새도 잠들 둥지가 있지만 자신에게는 그런 최소한의 안식처마저 없다고 피력하기도 한다. 다들 지구에서 천년만년 살려는 듯이 둥지를 틀고 있는데, 그는 만년 나그네처럼 사셨던 것이다.
그도 의욕에 찬 많은 종류의 얼굴들을 보았을 것이다. 그리고 하늘의 뜻을 땅위에 펴기 위해 동분서주하는 자신의 처지와 비교해 보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에게는 세상이 빼앗을 수 없는 평안이 있고 소박한 것들을 즐기는 기쁨이 있어 순진무구한 갓난아이의 복됨을 누린듯 하다.
그리고 "방이 많다는 아버지의 집" 에 대한 향수를 가슴에 품고 있었고, 우주 어디를 가나 발 닿는데가 곧 길인 그런 자유를 얻으셨고 생병의 근원, 한가지만을 소중히 여기셨던 것이다. 예수의 몸안에는 흙의 속성인 이런 나약함과 하늘의 속성인 불굴의 향수가 조화를 이루고 있기에 우리에게 더욱 친근한 것이다. 죄를 지으면 그 죄의 종이 된다고 예수는 가르친다. 관성의 법칙이라고도 할 수 있고 업보라고도 할 수 있다.
같은 원리로 천명을 따르기를 즐기던 예수에겐 어느날 하늘이 열리고 "네가 내 마음에 든다"는 음성이 들려온다. "도에 동화되는 자, 또는 덕에 동화되는 자를 얻는 것을 도도 덕도 그를 얻으매 즐거워 한다."는 노자의 이론처럼 하늘이 그를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장면이라 하겠다.
천하의 영화를 주겠다는 사탄의 제의를 단호히 물리치고 짐짓 가시밭 길을 걸어가는 예수의 운명이 연상된다. 수건을 허리춤에 꿰시고 발을 내밀라면서 일일이 씻기는 예수의 어머니 같은 모습, 암닭이 병아리를 품듯이 내가 너희를 품으려한 것이 몇번이었더냐 질문하시는 예수의 모습이 떠오른다. 남더러 다시나야 할 것을 종용하고 아이처럼 되어야 할 것을 가르치신 예수는 그 자신이 "영아"의 상태로 환원 된 것이고, 그것은 곧 "원목처럼 소박한 도의 시원의 경지에 다시 돌아 간것"이라 하겠다.
그리고 2000년 세월이 넘도록 이런 예수의 계곡으로 지구의 인심이 모여 든 것이리라. 그러한 까닭에 (원목처럼 소박한 도의 시원의 경지에 돌아가 있을---)저 박한 예와 허황된 지를 버리고 이 진실한 도와 후한 덕을 취한다." --도덕경 38장-- 예수는 바리새인들의 긴 옷자락이며 식사 때 손을 씻는 예식 따위를 안중에 두시지 않았고, 서기관들의 공허한 논증 따위를 거들떠 보시지 않았다. 그는 다만 하늘과 삼라만상에 대한 믿음성과 인간에 대한 자애심을 취했던 것이다. 그는 도와 덕을 택하고 예와 지를 버린셈이다.
오늘의 우리는 어떠한가 돌이켜 보게 한다. 우리는 종교적인 격식과 신학적인 논증에 더 큰 식욕을 느끼고 있는 것이나 아닌가? 지나친 격식 때문에 행여 작은자의 치유를 소흘히 할 수도 있으며 나의 논리적 증명 때문에 타인의 심령을 상하게 하지는 않았는지 한번 돌이켜 볼 일이다.
특별히 머나먼 타국땅에 흩어져 사는 우리네는 서로의 안녕과 행복을 위해 내가 먼저 섬기는 자세를 갖추어야겠다. 아무것도 아니면서 무엇인 것처럼, 간부나 상사의 자리가 섬김의 자리임을 너무도 잘 알면서 어느결엔가 섬김을 받고자하는 마음자리는 아닌지-------- 우선 필자 자신부터 내마음의 밭을 돌아보기 위해 이만 줄이고 다음주에 유로저널로 돌아 올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