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0파운드짜리 이야기

by eknews03 posted Feb 24,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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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사 화장실을 찾았는데 좌변기칸을 열고 들어가보니 누가 양복 재킷을 좌변기칸 문 안쪽에 걸어두고 나간 것이었다.

 

그냥 내 볼일만 보고 나가려 했는데 막상 나가려 하니 발걸음이 안 떨어졌다. 나는 본능적으로(?) 재킷을 만져보았다.

 

그것은 겉으로는 재킷을 두고 간 사람의 신원을 알 수 있는 물건을 찾는 것이었지만, 속으로는 혹시나 큰 돈이라도 담겨 있나 하는 순수하지 못한 호기심이었을 것이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안주머니에 묵직한 종이 뭉치와 플라스틱 카드가 만져졌다. 역시 본능적으로 그것들을 꺼내어보았더니 헬스클럽 회원카드와 20파운드짜리 수십 장 뭉치였다.

 

그랬다, 나는 족히 600파운드(100만원 가량)는 될 것으로 보이는 돈 뭉치를 발견한 것이다.

 

보통 이렇게 큰 현금을 지니고 다니는 경우가 매우 드문데, 재킷을 놓고 간 사람은 도대체 무슨 생각에서 이렇게 큰 현금을 지녔으며, 또 그 큰 현금이 든 재킷을 두고 간 것인지...

 

여하튼 생각지도 않은 돈 뭉치를 발견하니 갑자기 심장이 쿵쿵 뛰기 시작했다. 하필 화장실에는 아무도 없고 정적만 흘렀다.

 

물론, 그 돈은 한 푼도 내 돈이 아니고, 당연히 나는 그 재킷을 그냥 그 자리에 걸어두고 나오거나 아니면 어떻게든 주인을 찾아줬어야 한다.

 

하지만, 과연 그 순간에 정말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그럴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아닌가, 혹시 나만 빼고 다들 그렇게 하려나?

 

어쨌든, 적어도 나는 그 순간 너무나 사악하고 간사한 나 자신의 내면과 엄청난 혈투를 벌여야 했다. 그 부끄러운 혈투를 이 글을 통해 만천하게 공개하리로다!

 

일단, 신기하게도 영국에 와서 억울하게 돈을 잃었던 순간들이 떠올랐다, 그것도 딱 600파운드 정도의 돈을 잃었던 순간들로만.

 

노트북을 소매치기 당한 일, 집 렌트 중 억울하게 보증금을 떼인 일...

 

아마도 나의 사악하고 간사한 본능은 나 자신에게 그 동안 니가 그렇게 억울하게 잃은 돈을 보상할 절호의 기회다.”라고 속삭이고 있었던 것 같다.

 

게다가 가난한 사람의 돈을 훔치면 좀 더 죄책감이 느껴질텐데, 재킷 주머니에서 같이 나온 고급 헬스클럽 회원권을 보니 적어도 경제적으로 어려운 사람일 것 같지는 않았다.

 

가난한 자의 돈을 훔치건, 부자의 돈을 훔치건, 둘 다 똑같은 도둑질이건만...

 

그렇게 나는 이 돈을 훔쳐도 죄책감을 느끼지 않을 오만가지 핑계를 찾으며 나의 도둑질을 정당화시키려 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어서 이 돈을 어떻게 쓸까 하는 상상이 이어졌다. 평소 갖고 싶었던 것, 먹고 싶었던 것을 살 수도 있고, 아니면 통장에 입금해서 통장 잔고를 높일 수도 있다.

 

그러다가 문득 내가 지금 남의 돈을 보면서 무슨 생각을 하는 것인지 퍼뜩 정신이 들었다. 얼른 그 돈을 다시 재킷 주머니에 넣고 그냥 재킷을 그 자리에 놔두고 좌변기칸에서 나왔다.

 

그런데, 화장실은 계속 아무도 없었고, 나중에 누군가가 들어와서 나처럼 그 재킷을 발견하고 결국 그 돈을 훔쳐갈 것 같다는 생각이 드니 괜히 아까운(?) 기분이 들었다.

 

정말 부끄럽게도 나는 다시 그 좌변기칸으로 들어갔다.

 

또 다시 나 자신과의 혈투가 벌어졌다. 어차피 누군가가 훔쳐갈 돈, 이왕이면 내가 갖는 게 좋겠다는 생각이 강해졌다.

 

돈만 챙기고 재킷은 그냥 걸어두고 나올까? 혹시 재킷에서 내 지문이라도 나오면 어쩌나? 재킷을 통째로 들고 나가는 것은 너무 위험한데...”

 

오만가지 생각들이 스쳐가는 중 문득 그렇게 나 자신과의 혈투를 벌이고 있는 내 모습이 막말로 너무나 쪽팔렸다.

 

비록 화장실은 쥐죽은 듯 적막이 흘렀고 아무도 나를 보는 눈은 없었지만, 하늘이 보고 계셨고, 부모님과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이 보고 있는 듯 했다.

 

그 돈을 훔쳐놓고서 당장 이번 주 일요일 교회에 앉아 있는 내 모습을 상상하니 토가 나올 것 같았다.

 

그 돈을 훔쳐놓고서 그것 때문에 남은 평생 짊어져야 할 죄책감과 나 자신에 대한 혐오감을 생각하니 몸서리가 쳐졌다. 안 그래도 이미 너무 무거운 마음의 짐을 지고 사느라 죽을 맛인데, 이깟 돈 몇 푼에 마음의 짐을 추가할 수는 없었다.

 

나는 그 재킷을 들고 나와서 리셉션에 갖다주고 주인을 찾아주라고 했다.

 

이 모든 게 불과 5분도 안 되는 시간 동안 일어난 일이다.

 

비록 나는 결과적으로는 옳은 결정을 내렸지만, 그 결정을 내리기까지 너무나 추악한 나 자신을 만날 수 있었다.

 

만약 그 돈이 600파운드가 아니라 6백만 파운드, 아니 6천 파운드만 되었어도 나는 어쩌면 다른 선택을 했었을까?

 

혹시 몇 년 뒤에 똑 같은 상황을 만나더라도 과연 나는 이번과 같은 선택을 하고 있을까?

 

안 그래도 요즘 글이 잘 안 써져서 어려움을 겪고 있었는데, 비록 600파운드는 그림의 떡으로 끝났지만 대신에 오늘 한 편의 이야기를 쓸 수 있었다. 고로 이 글은 600파운드짜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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