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로저널 단독보도 재독동포 김영상박사 북한방문기
60년만에 다시 찾은 내 고향 북녁땅 (6)
김영상박사(81)는 개성에서 출생해 당시 6년제인 개성중학교를 다니던 중 6.25를 만났다. 18세의 나이에 미 보병 25사단 예하 35연대 군속으로 종군하면서 가족과 헤어진 것이 오늘에 이른다. 김씨는 서울공대를 졸업한 후1958년 유학길에 올랐다. 독일 하노버 공대(석사)와 슈투트가르트 공대에서 기계공학을 전공(공학박사)했다. 김박사는 MAN회사, Hoechst 화학회사 등 독일 유명 기업에서 연구원으로 재직했으며 1994년 정년 퇴직했다. 그는 재독한국과학기술자협회장, 프랑크푸르트 한국문화회관 대표를 역임했고, 현재 거주지인 하터스하임(Hattersheim)의 외국인 후원정책팀 고문직을 맡아보고 있다. 독일인 아내 사이에 두 아들을 두었다. 이 기행문은 일기형식으로 꾸며졌으며 독자의 이해를 돕기 위해 사실을 왜곡하지 않는 범위 내에서 취재기자(김운경)가 정리했다.
5월9일(수)
남포 서해갑문
강서에서 고구려시대 고분들을 둘러본 후 우리는 버스를 타고 계속 서쪽를 향해 달렸다. 이윽고 도착한 곳은 남포의 서해갑문. 북한 TV의 배경으로 자주 등장할 만큼 북한이 자랑하는 시설로 외국인 필수 관광 코스이기도 하다. 지난 80년대 40억 달러를 들여 지었다는 이 시설은 다목적댐과 갑문으로 이루어져 있다. 8km에 달하는 댐을 건설해 대동강 수위를 높여 5만톤급 선박의 통행을 가능케 했으며, 36개 수문을 통해 물 수위를 조절하는 한편, 해수가 담수로 유입되는 것을 막아 물부족 현상을 해결했다는 것. 그러나 유실된 경작지가 얼마나 되는지에 대해서는 설명이 없었다. 북한에는 민간 건설회사가 없다. 건물, 도로, 교량 등 모든 인프라 시설은 군 공병대가 전적으로 맡아서 한다. 가정마다 수 년동안 군복무를 하는 자녀들이 있고 또 이들이 민간사회의 건설 현장에도 투입되기 때문에 북한 국민은 한마디로 군대와 함께 산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인민들의 군에 대한 평가가 긍정적인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다.
우리는 서해갑문을 구경하다가 우연히 막 결혼식을 마친 신혼부부 일행을 보게되었다. 신랑은 양복 정장차림에 가슴에 꽃을 달았고, 신부는 머리에 꽃띠를 하고 화려한 꽃장식의 한복을 입고 있었으며 친인척과 하객들도 신랑신부와 함께 무리를 지어 주변을 관광하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자 문득 요즘의 북한 결혼풍습이 궁금해졌다. 안내인의 설명은 다음과 같았다:
현재 북한의 평균 혼인 연령은 남자 30세, 여자 25세 내외. 수 년전만해도 결혼은 대부분 부모들이나 친척들의 중매로 이루어졌지만 지금은 스스로 결혼상대자를 찾는다. 청춘남녀가 연애하는 것은 허용되지만 혼전동거는 금지되어 있다. 결혼하면 생산을 해야 하기 때문에 피임은 안됀다. 북한정부는 최소한 2명의 자녀를 낳을 것을 강력히 권하고 있으며 이에 따라 대부분의 북한 가정은 평균 2명의 자녀를 두었다. 결혼과 관련해 재미있는 표현들이 있다. 모두 새에 비유된 표현인데 남녀가 연애할 때 모습은 ‘제비’같고, 약혼할 때는‘비둘기’ 같으며 결혼할 때는 ‘다색 오리’ 같다고 한다. 북한의 이혼율은 통계에 따르면 1% 정도다. 부모의 허락을 받으면 예비신랑신부는 먼저 관청에 혼인신고부터 한다. 결혼식은 그 다음이다. 결혼예식 후에는 피로연이 열린다. 피로연은 가족과 가까운 친인척이 모여 조촐히 치르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 신혼부부는 일단 부모님과 함께 살면서 신혼부부용 주택을 해당관청에 신청한다. 최근엔 빠르면 3년정도 기다리면 신접살림을 펼칠 내 집을 받을 수 있다고 한다. 그러나 장남은 제금나지 않고 부모와 함께 살며 부모를 부양해야 한다. 또 대학 재학중에 결혼하게 되면 학교기숙사에서 나가야 하는데 그 대신 정부에서 이들이 살 집을 주선해준다고 한다.
우리 일행은 남포 시내의 한 작은 식당에서 점심을 먹었다. 메뉴는 김치, 구운생선, 물김치, 구운닭고기, 야채, 토스트빵 등이었다. 음료수로는 강한 맛의 오미자차가 나왔다. 나는 1998년에 처음 북한을 방문했는데 당시 나는 북한에 독일-북한간 합작제약회사를 설립할 목적으로 독일측 실무섭외자 자격으로 오게 되었다. 북한 관계자 몇 명과 함께 남포를 시찰하러 왔었는데 식당이 없어 궁여지책으로 생조개를 사다가 차에서 뽑아낸 휘발류로 구워먹으며 허기를 달랬던 일이 있었다. 그 후 14년이 지나 다시 남포에 오니 그때의 기억이 생생히 떠오르는 것이 감개가 무량하다.
만경대 '고향집'
우리는 베이스 캠프 평양으로 다시 돌아와 만경대로 향했다. 평양 중심지에서 15km 정도 서쪽에 위치한 만경대는 김일성 생가가 있는 곳으로서 1947년부터 혁명사적지로 지정되면서 성역화되었으며 북한을 방문하는 외국인들의 필수 관광코스다. 원래 오늘 아침에 방문하는 일정이었는데 시내가 정체가 심해 남포를 먼저 다녀오기로 했다. 안내원 K가 융통성있게 일정을 조정한 덕분에 순서는 뒤바뀌었어도 오늘 예정된 일정을 다 소화했다. 그런데 오후에 우리가 만경대를 찾았을 때도 얼마나 인파로 북적대던지 마치 무슨 민족 대이동을 보는 것 같았다. 버스와 승용차는 계속 사람들을 토해내고 있었고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 수도 없는 수 많은 단체들이 끊임없이 몰려오고 몰려갔다. 우리 일행도 약 1,5km 전에 차에서 내려 걸어서 만경대로 올라갔다. 모두가 군대식으로 대오를 맞춰 질서있게 가고 있었는데 우리 일행만 제멋대로 걸었다. 사람들이 우리를 바라보는 시선이 곱지 않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김일성 생가는 지난 2003년 방문 때 본 그대로였다. 작은 문 좌우에는 얕고 두터운 진흙벽이 있었고 그 앞에 이름 모를 여름 꽃들이 초라하게 피어있었다. 왼쪽 창고에는 농기구, 나무통, 항아리 등이 있었고 오른쪽 마루 뒤 켠에 3개의 방이 있었다. 방마다 소박한 가구가 갖춰져 있었으며 벽에는 가족사진도 걸려 있었다. 지붕이 볏집으로 두껍게 덮여있는 것이 예전 시골 농가의 모습과 같았다. 그리고 집에서 약 100m 떨어진 곳에 샘물이 있었는데, 북한주민들은 이 물을 기념으로 시원하게 마셨지만 안내원 K는 우리에게 샘물에 불순물이 있을 수 있으므로 외국인들은 배탈이 날 염려가 있으니 마시지 말라고 했다.
평양 교예단
평양 시내로 돌아와 교예단을 방문했다. 1급 써커스단은 아니었지만 훌륭한 기량을 지니고 있었다. 공연 중에 촬영이 금지되었는데 우리는 못알아 들은체 사진을 찍어댔다. 공연은 매주 2회였고 우리가 가던 날 객석은 2/3 정도 찼다. 관객 대부분은 군인들이었고 외국인 방문객들은 소수였다.
써커스를 구경하고 밖으로 나오니 저녁인데도 날이 여전히 훤했다. 길가에는 주민들과 학생들의 모습을 많이 보였다. 안내원 K가 식당까지 산보겸 걸어가자고 제안해 우리 일행은 모두 찬성, 그를 따라 나섰다. 사실 나는 그의 제안을 듣고 깜짝 놀랐다. 평양의 대로를 산보를 하다니~! 과거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우리는 좌우로 대형건물들이 즐비하게 들어선 세내를 자유럽게 활보하며 지나가는 평양시민들에게 “헬로우, 하우 아 유” 하며 인사를 건넸다. 우리 팀 중에 젊은이가 둘 있었는데 이들이 여학생들에게 “헬로우 위 아 저먼 ” 하고 말을 걸면 여학생들도 웃음을 띠며 “저머니, 저머니” 라는 말을 되풀이하며 호기심에 가득찬 시선을 보내는 것이었다. '말타면 경마잡히고 싶다'던가, 두 독일인은 점점 더 용감해졌다. 이제는 아얘 여학생들을 붙들고 수다를 떤다. 수 분 동안이나 길에 선 채로 독일어, 영어 뿐만 아니라 짧은 한국어까지 구사하며 상대방을 이해시키려고 애썼다. 이따금 그들이 서로 바라보며 큰 소리로 웃는 모습을 보면 정말 뭘 이해하고 웃는 건지 아니면 모르면서도 서로 하는 짓이 우스워서 웃는 건지 모르겠다. 우리들은 줄창 사진을 찍어댔다. 보이는 모든 것을 다 카메라에 담으려는 듯. 안내원 K가 우리행동에 일체 간섭하지 않았다. 우리를 향한 시민들의 태도는 호기심으로 유심히 보거나 무시하거나였다. 그러나 적대감을 보이는 눈빛은 없었던 것 같다. 오히려 친절한 태도를 보였으며 무엇보다 자연스러웠다. 서로 떨어져 약 30분 정도 산보했을까, 둘러보니 일행 중3명이 안보였다. K가 찾아나섰다. 10분가량 지난 후에 K가 사라진 3명을 데리로 나타났다. K는 화도 내지 않고 일행에서 멀리 떨어지지 말라고만 했다. 시내에서 흔히 보는 순찰경찰도 우리를 바라보기만 할 뿐 우리 행동을 제재를 가하지 않았다. 2003년만 해도 이럴 경우 경찰은 즉시 행동을 중지시키고 안내원을 불러 호되게 야단쳤을 것이다. 내 아내 일제도 이같은 평양의 모습에 마찬가지로 놀란 것 같았다. 9년 사이 북한은 너무 많이 변했다.
한 시간 남짓 걸어 ‘평양 오리구이집’에 도착했다. 중형 대중식당이었다. 이 집에서 가장 맛있다는 오리 불고기를 주문했다. 식탁 위에 한 사람 앞에 하나씩 가스렌지가 놓이고 접시에 1인분씩 적당한 크기의 양념된 오리고기가 담겨 나왔다. 또 곁들여 먹는 신선한 야채가 식탁 위에 푸짐하게 차려졌다. 독일인들의 고기굽는 손놀림이 어눌한 걸 보더니 여자 종업원들이 눈치빠르게 와서 도와주었다. 모두 몇 끼 굶었던 사람들처럼 게걸스럽게 먹었다. 시장했던 일행은 모두 맛있게 먹었다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다음 호에 계속~>
글: 김영상박사, 사진: 부인 김일제
정리: 유로저널 프랑크푸르트 김운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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