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세계에 450만부가 팔리면서, 프랑스는 물론, 유럽, 뉴욕까지 분노 신드롬을 일으켰던 소책자, <분노하라>의 저자, 2차 대전 때에는 나치에 저항하던 레지스탕스였고, 이후 외교관, 인권운동가로 활약했던 스테판 에셀이 95세를 일기로 지난 2월 27일 숨을 거두었다.
프랑스의 외교관으로, 전 레지스탕스 대원으로 또한 유태인 아버지를 둔 탓에 유태인수용소에 잡혀있다가 구사일생으로 탈출하기도 했던 에셀은 1세기에 거쳐, 매우 독특하면서도 놀라운 일생을 살았다. 2010년 출간된 <분노하라>는 전대미문의 신드롬을 일으키며, 말년의 스테판 에셀을 전세계적인 멘토의 자리에 올려놓았다.
1917년 베를린에서 태어난 에셀은 7살에 어머니를 따라 파리로 건너왔다. 에셀의 어머니와 아버지, 그리고 어머니로 하여금 파리로 건너오게 한 어머니의 연인이자 아버지의 절친인 앙리 삐에르 로셰의 이야기는, 프랑수와 트뤼포에 의해 영화<줄과 짐>으로 만들어지면서, 전설이 된다. 19살, 프랑스인으로 귀화하고, 에콜 노말에 들어가 공부한 그는 2차대전이 발발하자 드골을 따라 레지스탕스로 활약하다가, 게슈타포에 의해 체포되어 죽음의 직전에서 탈출한다. 전쟁이 끝나자, 유엔에 들어가 외교관 활동을 시작한 그는 세계인권선언문 작성하는 멤버의 1인이 된다. 이후 베트남, 알제리 등지에서 외교관 생활을 했다. 은퇴 이후로는 인권운동, 환경운동, 반전운동등 전방위의 운동가로 약한 자들의 편에 서서 쉼없는 운동가로서의 활약을 펼쳐왔다. 2010년 출간되어 전세계에 번역된 <분노하라> 외에도 <세기와 함께 춤을>(1997), <국경없는 시민>(2008), <희망의 길>, <참여하라>(2011) 등 13권의 저서를 남기기도 했다. 한국에서도 이미 출간된 <분노하라>, <정신의 진보를 위하여>,<분노한 사람들에게>, <참여하라> 외에 그의 자서전 등이 곧 번역 출간될 예정이다.
사진 : AP
스테판 에셀은 죽기 전 리베라시옹과 가진 인터뷰에서 자신의 가장 소중한 인생의 보물에 대해 이렇게 털어 놓는다. “내 인생에서 가장 중요하게 다가왔던 일은 사랑하는 것이었다. 사랑한다는 것은 경이로운 일이다. 나는 많이 사랑할 수 있는 행운을 누렸다. 그것이야말로 내 인생에서 내가 누린 가장 놀라운 일이다. 내가 사랑할 수 있는 사람들을 만났다는 것. 그리고 나는 아주 많이 사랑했다.”
스테판 에셀이 사망한 날, 파리의 바스티유 광장에는 수많은 인파가 모여, 그의 죽음을 추모했다. 제네바의 유엔 인권위원회에서는 그를 위한 1분간의 추모의 묵념시간을 같은 날 가지기도 했다. 전세계 언론은 일제히 그의 죽음을 추모하고, 일생 동안 그가 남긴 업적과 실천해온 가치들을 기리는 특집 기사들을 앞 다투어 실었다.
장례식은 3월 7일(목) 파리 몽파르나스 묘지에서 이뤄진다.
몽파르나스 묘지에서의 장례식에 앞서, 엘리제궁의 결정에 따라, 앵발리드에서 군대식 명예의식이 거행된다. 많은 정치인들은 에셀이 프랑스의 위인들이 잠들어 있는 팡테옹에 묻혀야 한다고 서명운동에 나서기도 했다. “스테판 에셀이 남긴 메시지, 분노할 만한 상황에서 분노해야 하는 유리의 의무를 일깨운 것은, 모든 형태의 불의를 받아들이지 말 것을 우리에게 요구한 것이었고, 이 메시지는 이제 우리 모두의 유산이 되었다. [...]우리에게는 이제 그의 기억을 전하고, 그가 호소한 가치들, 생각들을 우리 모두에게, 특히 젊은 세대에게 전하여 미래를 위한 모델로 삼아야 하는 임무가 남아있다. ” 청원서는 스테판 에셀이 팡테옹에 안치되어야 할 이유를 이렇게 적고 있다. 사회당의 오랜 지지자였던 스테판 에셀을 위한 이 청원서에는 녹색당의 에바졸리를 비롯, 다수의 사회당 의원, 심지어는 우파 대중민주연합 출신의 정치인들까지 가세함으로써, 스테판 에셀이 프랑스에서는 드물게 좌우 진영을 망라하여 일치된 존경을 받았던 인물이었음을 입증했다.
정수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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