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로저널 단독보도 재독동포 김영상박사 북한방문기
60년만에 다시 찾은 내 고향 북녁땅 (10, 최종회)
김영상박사(81)는 개성에서 출생해 당시 6년제인 개성중학교를 다니던 중 6.25를 만났다. 18세의 나이에 미 보병 25사단 예하 35연대 군속으로 종군하면서 가족과 헤어진 것이 오늘에 이른다. 김씨는 서울공대를 졸업한 후1958년 유학길에 올랐다. 독일 하노버 공대(석사)와 슈투트가르트 공대에서 기계공학을 전공(공학박사)했다. 김박사는 MAN회사, Hoechst 화학회사 등 독일 유명 기업에서 연구원으로 재직했으며 1994년 정년 퇴직했다. 그는 재독한국과학기술자협회장, 프랑크푸르트 한국문화회관 대표를 역임했고, 현재 거주지인 하터스하임(Hattersheim)의 외국인 후원정책팀 고문직을 맡아보고 있다. 독일인 아내 사이에 두 아들을 두었다. 이 기행문은 일기형식으로 꾸며졌으며 독자의 이해를 돕기 위해 사실을 왜곡하지 않는 범위 내에서 취재기자(김운경)가 정리했다.
5월 12일(토)
금강산(金剛山) 도착
간간히 휴게소에 들러 옥수수차를 마시며 우리는 이번 여행의 마지막 방문지 금강산을 향해 남행을 계속했다. ‘동천’이란 곳을 지났다. 목탄가스 군용트럭들이 이따금 눈에 띠였다. 날이 저물고 있었다. 기온도 내려가 피부로 스치는 산바람이 차다. 서둘러 일과를 마치는 농부들의 모습이 분주해 보였다. '금강산 12km' 팻말이 보이는가 싶더니 이내 검문소가 나타났다. 강원도 고성에서 우리는 다시 한번 검문을 받았다. 그리고나서 장장 450km 험한 길 대장정의 버스여행 끝에 마침내 금강산에 도착했다.
우리가 여장을 푼 곳은 금강산 호텔, 이곳에서 2박3일을 유숙하면서 금강산을 오를 예정이다. 사실 나는 아내와 함께 지난 2004년에 현대아산관광을 통해 이미 이곳을 다녀간 적이 있다. 이번이 두번째 금강산 등정인 셈이다. 그 당시 이곳은 연일 수 백명의 남한 관광객들로 분볐으며 관광센터를 비롯해 인근의 숙박시설들은 방이 없을 만큼 손님으로 가득찼다. 그런데 오늘 와 보니 센터는 텅 비어 있고 4성급 금강산호텔도 투숙객이 없어 썰렁하기만 했다. 북한당국이 현대아산 종업원들을 쫓아내고 북한인들에게 직접 운영을 맡기 후 경영상태는 엉망이었다. 중국인 방문객 몇 몇만 눈에 띠었다. 호텔 숍도 북한산 상품만 취급할 뿐 과거의 화려하고 다양한 상품들은 온데간데 없었다. 종업원들까지 딱딱한 인상을 주었다. 이런 상태로는 아무리 금강산을 자랑한다 하더라도 과연 외국인 관광객들의 호감을 얻을 수 있을지 우려되었다.
5월 13일(일)
금강산에 오르다
아침 9시 버스를 타고 금강산 계곡 아래까지 갔다. 안내원 K는 금강산에는 호랑이만 없고 나머지 짐승들은 모두 다 있다고 너스레를 떨었다. 그만큼 깊은 산이라는 뜻일게다. 우리는 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세찬 소리를 내며 흘러내리는 계곡 물줄기를 따라 올라갔다. 9년 전 금강산의 모습이 떠올랐다. 봉우리마다 그림같이 펼쳐지는 자연, 병풍처럼 두른 아름다운 경관들, 감동의 연속이었다.
산 길 돌계단의 높이가 일정하지 않아 계단을 오르내릴 때 조심해야 했다. 우리의 첫 목적지는 구룡폭포. 산 아래부터 2시간 남짓 올라가야 한다. 우리팀에게 젊은 여성 안내원이 배치되었다. 어머니와 단 둘이 산다는 23살의 미혼 아가씨였는데 어찌나 붙힘성이 좋던지 나를 보자마자 명랑한 목소리로 "할아버지 힘드시죠? 제가 도와드릴게요" 하고는 대뜸 팔장을 끼는 것이었다. 아가씨는 처음보는 나를 전혀 어려워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행동했다. 돌아가신 할아버지가 살아계시다면 나와 같은 나이라면서 정말로 자기 할아버지 대하듯이 하는 그녀의 상냥하고 가식없는 모습이 마음에 들었다. 그녀는 월 급여가 유로화로 10유로 정도이고 이와 함께 의복과 식량이 지급된다며 이 정도면 생활하는데는 충분하다고 했다.
나는 거북이처럼 서두르지 않고 천천히 그러나 끈기있게 산을 탔다. 한발짝 두발짝 100보를 오른 후 5분 쉬기를 몇 차례나 했던가, 7부 능선쯤에 이르니 우리 일행 중 두명이 쉬고 있었다. 70할머니와 40대 중반의 남자였는데 그들은 여기도 경치가 아름다우니 더 올라가지 않겠다며 정상 등반을 포기했다. 나는 나 자신과 싸워가며 끝까지 올라갔다. 목적지인 구룡폭포에 이르렀을 때 온 몸은 땀으로 범벅이 되었있었다. 하지만 폭포의 요란한 물소리가 어찌나 시원하던지 금세 땀이 들어가는 것 같았다. 귀가 멍멍할 만큼 우렁찬 폭포소리 그리고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주변 경관, 하늘로 치솟은 산봉우리와 바위에 부딛혀 산산히 부서져 내리는 폭포수. 나는 이 엄숙한 대자연 앞에 주눅이 들어 그저 멍하니 바라보고만 있었다. 묘향산이 가을에 진기한 향기를 뿜어내는 산이라면 금강산은 기암절벽과 폭포가 어우러진 자연의 기적물이라고나 할까, 나는 얼음같이 차고 투명한 옥색 폭포수를 한 병 가득 담아가지고 하산했다.
5월 14일 (월)
다시 평양으로
아침 8시, 평생을 살고 싶은 금강산을 떠나 평양으로 향했다. 어제 저녁부터 시작한 비가 그치지 않고 추적축적 계속 내리고 있었다. 다시 거친 도로에 몸을 맡긴 채 여행을 계속했다. 평양으로 오는 길에 원산에 잠시 들려 몇 군데 구경을 하고 점심을 먹었다. 농부들이 우비도 없이 땅에 꿇어앉아 무엇인가 쉬지 않고 일을 하고 있다.
평양을 약 100km 남겨둔 지점에 광능사라는 큰 절이 있었다. 이번 여행에서 우리가 방문하는 마지막 유적지였다. 고구려 시조 동명성왕 능 바로 옆에 자리잡았는데 한국동란 때 폭격으로 거의 완파된 것을 1990년대에 재건했다.
5월15일(화)
북한 여행을 마치고
북한 여행은 휴양과 거리가 멀다. 휴양이라기 보다는 탐방이라는 것이 맞을 성 싶다. 나는 사실 이번에 북한동포들의 삶의 현장을 좀더 가까이서 보고 가능한 한 체험도 하고 싶었다. 행동에 자유가 없기 때문에 마음대로 나다닐 수가 없었고 그렇기 때문에 여전히 수박 겉핥기식 여행이었지만 그래도 과거에 비해 주민들의 생활상을 좀 더 자세히 볼 수 있어 소득이 있었다. 특히 이번 여행에서 확인할 수 있었던 것은 그 동안 북한이 괄목한 만큼 상당히 변했다는 점이다. 이런 점에서 이번 북한 여행은 나름 의미가 있었다고 스스로 평가한다.
나는 북한을 2012년 방문까지 합쳐 모두 세 번 다녀왔다. 1998년엔 독일제약회사와의 합작회사 설립건으로 2주일간 체류했었고 2003년엔 한국동란 때 헤어진 가족들을 만나기 위해 1주일 동안 방문했다. 그리고 이번에 11일간 관광을 했다. 1998년 처음 방문했을 때 북한은 전력부족현상이 심각했다. 그런데 이번에 와보니 발전소가 새로 건설돼 전력문제가 상당히 해결됀 것 같았다. 평양의 밤하늘이 예전과 달리 환했다. 또 2003년만 해도 평양에서 군용트럭 외에는 승용차를 보기 힘들었는데 2012년에는 평양 중심가에서 때때로 교통정체가 일어날 만큼 차량 수가 급증했다. 특히자전거가 엄청나게 많아졌다는 것이 놀라운 변화였다. 지금 자전거는 북한 전국적으로 인민의 주요 교통수단 및 운송수단이 되었다.
한편 김일성 100주년 생일을 맞는 2012년까지 인민의 생활환경을 개선하겠다는 김정일 선포에 의거해 평양 시내에 많은 현대식 고층건물이 신축되면서 도시 전체의 모습이 예전과 달리 밝아졌다. 하지만 시골 농가들은 내가 어릴 적 보았던 모습과 다름없이 여전히 초라했고 발전이라곤 없었다. 농사짓는 방법도 사람의 인력으로 밭을 가는 등 60년 전 그대로였다. 북한은 논농사와 밭농사 합쳐서 수확량이 평년작인 경우 전 국민이 10개월간을 먹을 수 있기 때문에 나머지 2개월은 곡식이 없어 초근목피로 연명해야 하는 식량난에 허덕이고 있다.
북한은 현재 외국의 자본을 유치해 합작회사를 설립하는 사업을 확장하려고 노력한다. 중국회사와는 항구 및 광산개발사업을, 이집트의 Orascom사와 핸드폰 네트워크 구축, 독일 Siemens사와 교통신호등 설비 그리고 남한 현대자동차와 자동차공장 건설 등이 활발히 진행되고있다. 또 관광사업에 비상한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다. 4차선 도로가 소도시까지 확장되고 있었고 고속 도로 근처에 식당이나 커피숍이 생겼다. 아내는 서양 관광객들이 드나들면서 북한사회도 서방세계와 접할 수 밖에 없고 그러다보면 자극을 받게 마련이니 이제 북한의 변화는 시간문제라고 말했다. 물론 주체사상으로 무장된 북한이 얼마나 빨리 변할 것인지 또 서양의 문화를 어디까지 수용할 것인지는 두고봐야 할 것이다. 비록 지금 남북의 상황이 또다시 험악한 국면에 들어서 있지만, 내가 살아 있는 동안 조국의 평화통일을 맞이할 수 있기를 나는 오늘도 포기하기 않고 기대한다.
5월15일 새벽 5시 이른 아침을 먹고 공항으로 떠났다. 입국할 때 강제로 공항에 맡겨야 했던 핸드폰을 되찾아 9시발 북경행 고려항공기를 탔다. 오전 10시30분, 지금까지와는 다른 세상이 갑자기 우리 앞에 나타났다. 북경이었다. 눈이 부셨다.
글: 김영상 박사, 사진: 부인 김일제 여사
정리: 독일 유로저널 김운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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