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주일 생각지도 않았는데 첼리스트인 예쁜 혜정이가 크리스마스 카드를 내게 건넸다. 다음 주에 잠시 한국에 들어갔다 올 예정이라서 미리 전해주는 모양이었다. 별로 뚜렷하게 챙겨준 것도 하나 없는데 혜정이는 내가 함께 지하철을 타고 오가며 때로 따뜻한 말들을 해준 것까지 기억하고 그걸 감사해 했다. 동병상련이라고 한번은 둘 다 똑같이 감기에 걸려서 나중에 괜찮은지 물어보고 옷도 따뜻하게 잘 입고 다니고 음식도 잘 챙겨 먹으라고 얘기해준 것밖에는 없었는데…그런 사소한 것까지도 감사해하는 혜정이의 마음이 너무 예뻤다. 요새는 예쁜 여자들이 마음까지 예쁘다.
혜정이가 준 카드를 보면서 새삼 말 한마디 한마디 하는 것도 신경을 써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옛말에 ‘말 한마디로 천냥빚을 갚는다.’고 한 것처럼 무심코 내뱉는 말 한마디에 천냥의 가치가 있을 수도 있고, 혹은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날카로운 비수가 되어 다른 사람의 가슴을 후벼팔 수도 있기 때문이다.
짧은 말 한마디에 실린 무게가 이렇게 큰데, 말을 많이 쓰는 나는 어떡한다? 그 엄청 무거운(?) 무게들을 어찌 다 감당할까? 누구 좀 도와줄 사람 없어유? 말들이 무거워서 종이가 찢어질 아니 컴퓨터의 모니터 화면이 터질 것같아유. 이상은 농담이었습니다.
각설하고 말 한마디 잘못했다가 옷벗은 선생님 얘기가 생각난다. 내가 과외로 영어를 가르치던 아이에게서 들은 얘기이다. 그애의 이름을 편의상 ‘난주’라 하자. 고2 여학생치고 난주는 새치가 제법 많았고 머리숱은 아주 적었다. 그러니 새치들이 더 훤히 잘 보일 수밖에 없었다. 아직 어린 애가 왜 그리 새치가 많은지 용감하게 물었던 내게 난주가 해주는 이야기였다.
난주가 중3때였다. 고교입시를 앞두고 학교에서 모의고사를 치뤘는데 그날따라 난주는 머리가 몹시 아팠다. 너무나 머리가 깨질듯이 아픈 나머지 난주는 실제 입학시험이 아니라 참 다행으로 여기고 모의고사를 그냥 대충대충 치뤘다. 성적은 물론 그다지 좋지 않게 나왔다. 학교에서는 그 모의고사 결과를 바탕으로 인문계로 원서를 써줄지 혹은 실업계나 기타 학교로 써줄지 예정되어 있었던지 죽어도 인문계 학교를 가겠다는 난주에게 담임선생님이 한마디 하셨다.
“네가 인문계 들어가면 내 손에 장을 지진다.”
아직 어린 학생인지라 난주는 그런 선생님 앞에서 아무런 말도 못했지만, 눈에서는 불꽃이 일었다. 그날부터 시작해서 난주는 엄마 아빠가 너무 무리하지 말라고 말리는 것도 고사하고 날마다 집근처 독서실에 가서 밤을 새우다시피 하며 머리 싸매고 공부를 했다. 그랬더니 머리카락이 어느 날부터 우수수 빠지더란다. 어린 나이에 밤잠도 제대로 못자고 공부한다고 몸을 혹사시켜서 그 숱이 많던 머리카락이 그렇게 수난을 당했던 모양이었다. 그냥 포기하기에는 그 선생님의 독한 말 한마디가 난주에게 너무나 모욕적이었고 난주는 꼭 자기가 할 수 있다는 것과, 아직 채 피지도 못한 남의 인생을 함부로 진단하는 그 선생님이 틀렸다는 것을 증명해보이고 싶었다.
난주는 인문계 고등학교에 당당히 합격했고 그 선생님은 자기가 내뱉은 말 한마디로 인해서 눈물을 머금고 교사직을 내려놓았단다. 많은 여성들이 선호하는 그 교사직을 말이다.
내게도 그처럼 독한 말을 한 후배가 하나 있었다. 내가 나이 서른까지던가 서른다섯까지던가 성경을 100번 읽었다는 모집사님처럼 나도 서른다섯까지 성경을 100번 읽을 거라고 하니까 대번에 그 후배 왈, “누나가 그때까지 100번 읽으면 내 손에 장을 지진다.” 아이구, 그 인간하고는! 불행인지 다행인지 나는 나이 서른다섯까지 성경을 100번 읽지 못했고 --아직도 70번을 더 읽어야 한다. 흑흑--그래서 그 후배는 나중에 손에 장을 지지지 않은 채로 목사님이 될 수 있었다. 사람들의 영혼을 돌보는 목사님이 된 그 후배, 이제는 말을 따뜻하게 쓰기를 바란다.
차가운 비바람 불고 추운 겨울, 시린 손을 녹이고 마음을 덮혀주는 따뜻한 말을 써야겠다. 비싼 선물도 물론 좋지만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정감어린 따뜻한 말 한마디, 그걸 사람들은 더욱 바라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