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난히 업무가 폭주했던 지난 목요일 오후, 회사에서 정신없이 일하던 중 오후 5시 경 휴대폰이 울렸고 또 다른 업무 관련 전화인줄 알고
집어든 휴대폰에는 한국 발신번호가 떴다.
‘서른 즈음에’에 여러 번 등장했던 다섯
살 적에 만난 죽마고우 성훈이였다. 그런데, 완전히 술에 떡이 된 목소리였다.
하긴 그 시간은 한국 시간으로 새벽 1시였으니 그 때까지 술을 마셨다면 꽤 많이 마셨을 터, 거래처와 회사 일로 술을 진탕 마시고
문득 내 생각이 나서 전화를 했다고 한다.
잔뜩 혀가 꼬부라진 목소리로 내가 보고싶다는 친구, 그렇게 술에 취한 친구가 그리워해주는(?) 게 참 행복하기도 하고 고맙기도 했다.
영국에서 지내는 세월이 늘어갈수록 어느새 한국에서는 조금씩 잊혀진 존재가 되어감을
느끼던 중,
그래도 이렇게 나를 기억해주고 또 그리워해주는 소중한 벗이 있다는 게 얼마나 좋은 지.
누군가는 나에게 괴팍하다고 하지만 내가 비를 너무나 좋아하는 탓에 비가 퍼붓는 날이면
문득 내 생각이 난다면서 전화를 걸곤 했던 친구도 있었고, 통기타를 보거나 통기타 소리를 들으면 내 생각이
난다는 친구도 있었다.
내가 늘 그렇게 글을 쓰고 음악을 하면서 그리움과 추억에 빠져 살았던 것처럼 어느새
나 역시 그렇게 누군가의 그리움의 대상이 되어버린 걸까?
지난 번 한국 방문 때 성훈이를 만나서 나는 녀석을 신촌에 있는 포장마차로 이끌었다.
이제 서울에서 좀처럼 찾아보기 힘들어진 포장마차, 특히 의외로 신촌에는 포장마차가 거의 없는데, 예전 다주쇼핑 골목 구석에 그나마 예전 포장마차와
같은 진짜(?) 포장마차가 하나 숨어있다.
정작 한국에 사는 성훈이는 포장마차를 몇 년 만에 가보는 지 모르겠다며 나보다 더
들떠했다.
어느새 먹고 살기 바빠지고 가정을 꾸리면서 친구들을 만나 시간을 보내기가 너무나 어려워졌고, 회사 일로 형식적인 술자리들만 갖다가 나랑 포장마차에 오니 진짜 술맛이 난다며 좋아했던 녀석.
아마 그래서 더더욱 술에 취해 내 생각이 났나보다.
그러면서 성훈이는 사는 게 참 쉽지 않다면서 자신을 한국으로부터 탈출시켜달라고, 자신도 영국으로 데려가달라고 한다.
사실, 다른 친구들도 성훈이처럼
술에 취하면 한국을 탈출하고 싶다는 말을 종종 한다. 하지만, 과연
그들 중 실제로 정말 한국을 떠날 수 있는 선택이 주어지면 실행에 옮길 수 있는 이들은 몇이나 될까?
물론, 성훈이는 지난 번 한국에서
만났을 때 진지하게 가족과 함께 외국에 나가서 살 생각이 있다고 했다.
인간은 누구나, 더군다나 한창 정신없이
삶에 끌려가는 내 또래라면 더더욱, 자신이 처한 환경을 탈출하는 꿈을 꾸기 마련이다.
그런 면에서 나는 굳이 내가 처한 환경에서 탈출하고 싶은 적이 없으니, 어떻게 보면 축복받은 것이라고 할 수도 있는데, 정작 그 축복을 마냥 즐길 수만은 없는 이
슬픈 운명은 또 뭐란 말인가.
성훈이는 내가 한국에 살았더라면 그렇게 삶에 지칠 때, 아무 생각 없이 떠들고 웃고 싶을 때 서로 얼굴 보며 삶의 에너지를 충전할 수 있을텐데, 참
아쉽다고 한다.
그래서 내가 “나 그럼 한국 가서 살까?”했더니 그건 또 아니라면서 “너는 임마 니 꿈을 펼치면서 살어.”라고 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현실에 치이고 끌려가듯 살아가는데, 그나마 나 하나라도 이렇게 소신껏 자유롭게 꿈을 꾸며 여행하듯 살아가는 모습으로 남아주길 바라는 것일까?
뭐 그렇다고 내가 어떤 대단한 꿈을 품은 것도 아니고, 또 그 꿈을 멋지게 실현시킨 것도 아닌데, 다만 하루 하루 살아있음을 충분히 느끼고 만끽하며
살기 위해 때로는 이기적일 만큼 내 삶을 사랑한 것 뿐인데...
하지만, 자신의 삶을 너무나 사랑하는
것, 그리고 자신의 행복을 추구하는 것이 죄가 될 수도 있는 게 또 우리의 인생이다. 내가 내 인생의 진짜 주인이 되는 것은 거의 세상을 떠날 즈음에나 가능한 일일 테니까.
성훈이는 거의 집 앞에 도착해서 해장국 한 그릇 먹고 집에 들어간다며 전화를 끊었고, 전화를 끊고서 나는 다시 바쁜 업무에 빠져들었지만 술 취한 친구로부터 걸려온 한 통의 전화가 남긴 잔상은 한참 동안이나 내 마음을
떠나지 않았다.
사진출처: http://image.tagstory.com/MEDIA/IMG/20071115/V000117158_0.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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