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용어의 변화와 소유의식 ---
"사람의 일생은 말로 시작하여 말로 끝난다" 세일즈맨의 황제라고 불리우는 미국의 죠.지라드의 말이다.
이 말은 우리의 삶에 말이라고 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를 표현하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 속담에도 "말 한마디로 천냥 빚을 갚는다"라든가 "오는 말이 고와야 가는 말이 곱다" 등등 말에 대한 말들이 상당히 많으며 때로는 그 언어의 사용법에 따라 사용자나 듣는자의 인격을 반영하며 인간관계를 리드하기도하고 또한 그것이 사회언어가 되어 그 시대 사람들의 사고를 변화 시키기도 하고 사회적 이슈를 형성하기도 한다.
오늘은 필자와 독자가 함께 시대의 변천과 어법의 변화에 따른 존재와 소유의식에 대하여 이야기 하면서 한여름 더위를 잠시나마 잊어 볼까 한다.
원래 물건의 이름을 표시하는 것을 명사(noun)라고 한다.
나는 어떤 물건을 <가지고 있다>라고 말 할 수 있는데 예를 들자면 테이블, 주택, 책, 자동차 등이며 능동성과 그 어떤 과정을 표시하는 것은 동사(verb)이다.예를 들면 <나는 존재 한다> <나는 사랑한다> <나는 원한다> 등과 같은 표현이다.
그런데 그 어떤 <행동>이 <소유하다>라는 말로 표현되는 경우가 점차적으로 늘어나고 있다. 즉 명사가 동사대신에 쓰이고 있다. 그러나 어떤 행동을 명사와 결부된 <소유하다>라는 말로 표현하는 것은 언어의 잘 못된 사용방식이다. 왜냐하면 과정이나 행동은 소유될 수 없기 때문이다. 단지 그러한 것들은 경험 되어질 수 있을뿐이다.
예를 들자면 "나는 문제를 가지고 있습니다" 또는 "저는 불면증을 가지고 있습니다"라는 표현 등은 언어의 잘 못된 표현이다. 나는 고통을 당하고 있습니다 . 또는 나에기는 많은 문제가 있습니다. 나는 잠을 잘 수가 없습니다. 또는 나는 불면증이 있습니다. 라고 표현해야 될 것이다.
이러한 동사 대신에 명사를 사용함으로써 주관적 경험이 제거된다.
경험의 나를 소유의 그것으로 대치되어 버리는 것이다. 나는 문제를 가질 수 없다. 그것은 소유할 수 있는 물건이 아니기 때문이다. 위와 같이 언어의 사용이 잘 못되어 온 것은 어제, 오늘의 일은 아니다.
뒤.마르세(Du Marsais)라고 하는 문법학자는 이미 18세기에 언어의 잘 못된 사용방식 때문에 혼란이 오고 그로 인한 사회적 문제를 지적한 바 있다. 그의 저서 "문법의 진실한 법칙(Les Veritables Principes de la grammaire)라는 책에서 밝히기를 "나는 이러한 생각을 가지고 있다"라는 식의 표현은 잘 못된 표현이다. 나는 생각한다 또는 나는 이러이러한 방법으로 생각한다.라고 표현하는 것이 바른 언어 사용법이다.
이제, 여기에서 우리 독자들과 내가 함께 생각해 볼 문제는 동사가 명사에 의해 대치되는 현상이 우리의 삶 속에 어떠한 결과를 초래하는가 하는 것이다.
앞서 언급한 뒤.마르세가 명사가 동사를 죽이는 현상을 연구한지 1세기가 지난 후에 마르크스(K.Marx)와 엥겔스(F.Engels)가 "성스러운 가족"이라는 책에서 어법의 변화를 철저히 다루면서 브루노 바우어의 말을 인용한다.
바우어는 <사랑하는 인간> 혹은 <인간의 사랑>을 <사랑의 인간>으로 변환시키면서 사랑과 인간을 격리시키고 분리시켜서 하나의 실재로 만든다. 사랑은 신, 그것도 잔인한 여신이다 이 여신은 다른 모든 신들처럼 인간으로 하여금 영혼뿐이 아니라 육체적 자아까지도 희생하기를 요구하며 인간의 모든 것을 소유하려고 한다.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여기에서 동사 대신에 명사를 쓰는 경우의 결정적 요인을 지적하고 있다.
사랑이라는 명사는 능동성의 추상화에 불과하며 인간과 분리된 사랑하는 인간은 사랑의 인간이 된다. 다시 사랑은 여신이 되며 인간에게 그의 사랑하는 마음을 투사(incidence or projection)하는 우상이 된다. 이러한 과정에서 인간은 사랑을 경험하지 못하게 되며 사랑의 여신에 대한 굴종에 의해서만 사랑을 할 수 있는 능력과 접촉할 수 있다.
인간들은 능동적으로 느끼는 인물이 되기를 멈추고 하나의 고유명사 격이 되어버린 여신이라고 하는 우상숭배자가 되어 버렸다. 고 하면서그들(마르크스와 엥겔스)은 바우어에 의하여 변환된 여신의 자리에 공산주의 이념을 앉혔다.
오늘은 어떠한가, 자본주의의 발달과 함께 인간들의 소유의식은 그 한계를 넘어 극에 달하여 부익부 빈익빈의 모양새를 갖추고 있다. "갖는다(to have)"는 말은 얼핏 보기에는 단순한 표현이다. 모든 인간은 무엇인가를 갖고 산다.
아무 것도 갖지 않고 산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 하다. 그렇다면 왜 소유가 문제인가?
"갖는다"라는 말의 언어적 역사는 가장 자연스러운 범주라고 믿는 사람들은 많은 수의 언어에서 갖는다는 말이 없다는 사실을 좀 알아 둘 필요가 있다. 예를 들어 히브리어에서는 "나는 가지고 있다"는 <jesh li C=it is to me> "그것은 나에게 있다"라는 가접적 형태로 표현해야만 한다.
사실상 소유라는 말을 "나는 가지고 있다"라고 표현하지 않는 언어가 매우 많다. 언어의 발달과정으로 살펴 볼 때에도 "나는 가지고 있다"가 아닌 "그것은 나에게 있다"라는 구문이 우선적으로 이루어져 왔다.
다시 말하자면 갖는다는 말이 사유재산의 발달과 밀접한 관계를 갖고 발전해 왔으며 기능적 재산이 지배적인 사회 즉 쓰기 위한 소유만이 있는 사회에서는 이 "갖는다"라는 말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시사해 준다.
어떠한 말을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따라 그 사람의 사고, 감정, 행동 등이 결정된다. 또한 생존의 소유양식에서는 나와 세계와의 관계인데 소유나 점유의 관계 속에서 인간은 항상 자신을 포함한 모든 물건을 소유하고 싶어한다.
그러나 그러한 소유의식은 존재(being)양식 다음 순위임을 우리는 다시한번 짚고 넘어가야 한다. 생존의 존재양식에 있어서는 소유와 대조를 이루는 것으로 살아 있다는 것 자체가 세계와 진실로 관련되어 있음을 재인식 해야 될 필요가 있다.
존재형태에서 내적인 소유가 외적인 어떤 사람이나 물건의 진정한 본성이며 진정한 실재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될 것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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