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은 일상의 삶에서 매순간 순간 ‘나’를 의식하고 삽니다. 아침에 ‘나’가 일어나서 ‘나’가 세수하고 ‘나’가 운전해서 출근을 하고 하루 종일 사무실에서 ‘나’가 일을 하고 ∙∙∙ ‘나’가 퇴근길에 회식을 하고 집에 돌아와서 ‘나’는 잠이 들었습니다. ‘나’가 그 때 그 일을 했지. 그 때 ‘나’가 참 힘들었어. ‘나’가 한창 잘 나가던 때였지 ∙∙∙ 어느 한 순간도 ‘나’를 놓은 적이 없습니다.
사람은 ‘나’가 있어서 자기중심적입니다. 자기중심적이어서 생각하는 것도 말하는 것도 행하는 것도 자기의 기준잣대로 재단(裁斷)하고 판단합니다. 그리고 자기에게 이익이 되면 하고 이익이 되지 않으면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하늘 뜻을 따르지 않고 자기 뜻을 따릅니다. ‘나’가 있어 천리(天理)를 거스르며 삽니다. 또 자기중심적이어서 자기밖에 모릅니다. 자기를 위해서 삽니다. 남을 위해 한다는 것도 궁극적으로 자기를 위해 합니다. 선행조차도 자기를 위해 합니다. 참으로 이웃을 배려하고 살지를 못합니다.
역지사지(易地思之) 입장을 바꾸어서, 다시 말하면 상대방 입장에서 생각한다는 참 좋은 말입니다. 그러나 ‘나’가 있어서 항상 ‘나’가 앞서기 때문에 ‘나’의 입장에서 역지사지합니다. 온전히 상대방의 입장이 될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참된 역지사지는 할 수가 없습니다.
사랑도 ‘나’를 위해서 합니다. 아무런 조건 없이 상대방을 위해 배려하고 베풀고 나누지 못합니다. 부모 자식 간의 사랑도 연인간의 사랑도 ‘나’가 상대방에게 기대하는 것이 있어 기대가 충족되지 않으면 서운하기도 하고 배신감을 가지기도 합니다.
믿는 다는 것도 ‘나’를 위해 믿습니다. 온통 ‘나’가 자리 잡고 있어 믿음이 들어설 자리가 없습니다. 그러니 참 믿음도 없습니다.
복은 누가 주는 것이 아닙니다. 복은 짓는 것입니다. 복을 지으려면 마음이 복스러워야 하고 마음이 복스러우면 생각도 말도 행동도 모두 복스러워 하는 일마다 복을 짓고, 사는 것이 복 짓는 삶입니다. 그런데 ‘나’가 있으면 마음이 자기중심적인 이기심으로 가득 차 있어 복스러운 마음이 자리할 곳이 없어 복을 지을 수가 없습니다.
사람들은 ‘나’가 있어 고통 짐 지고 삽니다. 세상천지(天地)만물(萬物)만상(萬象)은 ‘나’가 없어 나고 들고 존재하는 것 일체가 순리(順理 = 하늘 뜻 = 세상의 이치)에 의합니다. 그런데 사람은 ‘나’가 있어 순리를 따르지 않고 ‘나’의 뜻을 따릅니다. 순리의 세상에서 순리를 따르지 않으니 사는 삶이 고통 짐일 수밖에 없습니다. 사람이라는 존재자체가 역리(逆理)의 존재이기 때문에 존재하는 자체가 고통이고 짐입니다.
고통 짐을 벗어나려면 ‘나’를 다 놓아야 합니다. 종교도 종국적으로 ‘나’를 놓으라고 합니다. 성현들은 죽음을 예고하고도 죽음을 피하지 않고 죽음의 길을 떠남으로써 ‘나’를 놓는 삶을 보여주었습니다. 근년에 마음빼기 방법이 나와 있어 살아서 ‘나’를 다 놓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참으로 복된 세상이 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