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은 ‘나’가 있어서 자기중심적(自己中心的)입니다. 자기중심적이어서 생각하는 것도 말하는 것도 행하는 것도 자기에게 이익이 되면 하고 이익이 되지 않으면 하지 않습니다. 그러니 섭리를 따르지 않고 자기이익을 따릅니다.
자기중심적이어서 자기밖에 모릅니다. 그래서 자기를 위해 삽니다. 남을 위해서 한다는 것도 자기를 위해서 합니다. 참으로 이웃을 배려하고 살지 못합니다. 선행(善行)을 한다는 것도 자기를 위해서 합니다.
역지사지(易地思之) - 입장을 바꾸어서, 다시 말하면 상대방 입장에서 생각한다는 좋은 말입니다. 그러나 ‘나’가 있으면 어디까지나 내 입장에서 역지사지합니다. 항상 ‘나’가 먼저이기 때문에 진정한 의미에서의 역지사지는 없습니다.
사랑도 ‘나’를 위해서 합니다. 참사랑은 아무런 조건 없이 배려하고 베푸는 것입니다. 태양이 호불호(好不好)를 떠나서 미우나 고우나 고루고루 조건 없이 빛을 비추듯이. 사람은 아무런 대가(代價)나 조건 없이 상대방을 배려하고 상대방을 위해 주는 참사랑을 해본 적이 없습니다. 마음에 들 때만 사랑하는 것은 참사랑이 아닙니다, 참사랑은 ‘내가 얼마나 사랑했는데 저럴 수가 있나’ 하는 서운함이 없습니다. 또 참사랑에는 배신이 있을 수가 없습니다.
신앙도 죄업(罪業)의 존재인 나를 위해서 믿습니다. 은연중에 사는 동안 복을 받고 죽어서는 천극락(天極樂)에 가겠다는 바람을 깔고 믿습니다. 자기중심적인 ‘나’가 자리하고 있어 참믿음이 들어설 자리가 없습니다.
복은 누가 주는 것이 아닙니다. 복은 자기가 짓는 것입니다. 세상만사는 인과(因果)입니다. 복의 씨앗을 뿌려서(因) 복을 거두는 것(果)입니다. 복을 지으려면 마음이 복스러워야 합니다. ‘나’가 있으면 욕심과 집착이 가득 차 있고 자기중심적인 이기심이 앞서기 때문에 복스러운 마음이 들어설 곳이 없습니다.
사람은 경전(經典)도 자기중심적으로 해석합니다. 경전의 뜻도 자기에게 유리한 쪽으로 해석합니다. 계명이나 계율대로 살지 못하는 것도 ‘어차피 사람은 그렇게 살지 못 한다’ 고 당연시합니다. 그렇게 살지 못하는 것을 합리화할 수 있는 적절한 구절을 찾아 변명과 핑계가 되게 해석합니다. 또 복을 빌면 신이 들어준다고 합니다. 죄업을 가진 존재(사람)가 원하는 것을 들어주면 죄업의 존재는 더 기고만장(氣高萬丈)하게 되므로 신이 들어줄리 만무한데 적당히 얼버무려 ‘간절히 기도하면 다 들어 준다’고 합니다. 들어줄 복은 따로 있습니다.
자기중심적인 존재인 사람은 세상을 등지고 있습니다. 세상 섭리를 거스르는 존재입니다. 세상을 자기에게 맞추려 합니다.
사람은 자기중심적이어서 항상 핑계거리를 만들어서 자신을 옹호하고 합리화하고 변명합니다. 이렇게 하는 것은 천지만물만상(天地萬物萬象) 중에 사람밖에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