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 우리나라 기자의 프랑스 와인 기행 3>
와인은 살아있다?
생명이란 무엇인가? 즉, 살아있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이런 질문으로 시작하고 보니 갑자기 철학 칼럼이 된 것 같다.
하지만 이 질문은 철학과 관련이 깊기도 하다.
대학 시절 철학 강의 중 “생태윤리학”이라는 수업을 들었었는데, 그 수업의 가장 중요한 관심사 중 하나가 바로 이 질문이었다.
일반적인 사람들이라면 우리들 인간, 소와 돼지 같은 동물, 그리고 들에 핀 꽃과 포도나무에 달린 포도송이와 같은 식물이 살아있는 생명체라는 것에 동의할 것이다.
하지만 마트 과일 코너의 포도와 정육점의 삼겹살이 살아있다는 것에는 고개를 갸웃거릴지도 모른다.
그리고 누군가 진지하게 오동나무로 만든 책상이나 알루미늄으로 만든 빨래 건조대도 살아있는 생명이라고 말한다면 슬슬 그를 피하게 될 것이다.
하지만 생태윤리학자들 사이에서는 이와 같은 논쟁이 진지하게 이루어진다고 한다.
어떤 학자들은 오동나무 책상도 인간의 감각기관으로 보자면 어떠한 움직임도 없는 생명 없는 물체에 불과하지만 인간의 감각 그 너머로 관찰하면 사람들은 죽었다고 하는 그 나무 속에서도 여전히 엄청난 역동이 일어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살아있다는 개념을 좀 더 확장하고 인간 중심의 관점을 벗어날 경우 자르고, 다듬고 심지어 니스칠까지 다 해 버린 그 딱딱한 책상에도 생명이 있다는 것이다.
땅, 불, 바람, 물, 마음(?), 그리고 더 나아가 세상의 모든 존재는 살아있다고 말하기도 한다.
그렇다면 와인은 어떤가? 와인은 살아있는가?
와인업계 종사자와 애호가들은 당연히 살아있다고 생각한다.
병에 담기는 순간 와인은 태어나서 어린 시절을 거쳐 성숙해져 가다가 시음 적기라 불리는 절정의 때를 지나 점점 황혼을 향해 간다고 이야기한다.
하지만 이처럼 와인은 살아있다고 생각하고, 그래서 와인이 살기에 가장 적합한 온도와 습도를 유지해주기 위해 값비싼 와인셀러 구입도 마다치 않는 와인 애호가들도 보통 오렌지 주스가 살아있다고 생각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리고 와인 애호가들이 아닌 일반인들이 보기에는 와인이나 오렌지 주스나 별반 다를 바가 없을 것이고, 결국 대다수의 보통 사람들은 병 속에 들어있는 와인을 보고 살아있다고 하지는 않으리라는 것이다.
그러면 와인의 나라 프랑스 사람들은 어떻게 생각할까?
프랑스에 와서 인터넷 쇼핑몰을 통해서 물건을 구입해 보니 우리나라와 다른 점이 크게 두 가지가 있었는데 하나는 배송 기간이 우리나라보다 약 10배 정도 더 길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주류의 전자상거래가 가능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나도 그 새로운 세계를 만나 보고자 프랑스의 유명 인터넷 쇼핑몰에서 와인을 한 병 주문했다. 인터넷으로 주문한 와인이 정말로 도착했고 배송은 정확히 27일이 걸렸다.
나는 결재를 한 후 와인을 만들기 시작하는 줄 알았다.
우리나라에서는 불가능한 두 가지를 동시에 경험했다
.
그런데 그 쇼핑몰에서는 자신들이 판매하는 와인들이 어떤 와인이고 어떤 음식과 잘 어울리는지 등 여러 안내가 있는데, 그 아래 배송 관련 안내에 보니 이런 문구가 있었다.
“와인은 살아있고 섬세한 제품으로 배송 과정에서 충격을 받을 수 있으니 스스로 회복할 수 있도록 적어도 배송 후 3주 정도 두었다가 드시길 권합니다.”
‘와인이 살아있다고?’
이 정도면 거의 이번 브라질 월드컵에 참가하는 우리나라 축구 대표 선수들이 현지 적응을 위해서 미리 입국하는 기간과 비슷한 수준일 듯하다.
오히려 인간보다 더 인간다운 대접을 받는 것 같다.
그렇다면 이곳은 와인애호가들을 위한 전문 사이트인가? 아니다.
이 쇼핑몰은 옷, 가방, 보석, 가구, 여행, 공연, 심지어 헬스클럽 이용료 반값 할인 등 방대한 상품을 판매하는 종합쇼핑몰이라고 할 수 있다.
업체의 이윤 창출의 목적에서 보자면 소비자들이 와인을 구입해서 최대한 빨리 마시고 다시 구입하게 만드는 것이 훨씬 유리한 것이 사실이다.
그 와인을 만든 생산자가 자신의 와인을 판매하면서 그렇게 이야기했다면 이해가 간다. 하지만 생산자도 아닌 일개 인터넷 쇼핑몰에서 왜 그렇게 마시길 권했을까?
물론 고도의 마케팅 전략일 수도 있다. 하지만 나는 그 이유 보다는 그들이 진심으로 와인을 좋아하는 프랑스인들이기 때문일 것이라 생각한다. 내가 너무 순진한 것인가?
와인을 좋아하고 사랑하는 사람들이라면 누군가가 2009년산 샤토 라투르(Chateau Latour)를 디켄팅도 없이 바로 열어서 30분 내로 다 마셔 버렸다는, 또는 1999년산 살롱(Salon Blanc de blancs Le Mesnil)) 샴페인을 여름에 상온에 뒀다가 미지근하게 마셨다는 소식을 듣게 된다면 이 한 마디와 함께 가슴을 치며 안타까워할 것이다.
“오호! 통재라!!” 자신이 그렇게 마신 것도 아닌데 말이다.
이 부분을 읽으며 혀를 차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와인 애호가이다.
샤토 라투르와 같이 강건한 와인이라면, 게다가 2009년과 같이 뜨거웠던 날씨의 빈티지라면 최소 30~40년 이상 충분히 숙성을 시켰을 때, 그리고 살롱과 같은 뛰어난 샴페인이라면 일반 샴페인만큼 차갑게 마시지는 않더라도 충분히 칠링(Chilling)을 시켰을 때 자신이 가진 최고의 모습을 보여줄 수 있다.
와인을 아끼고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모든 와인이 각각 자신이 가지고 있는 최고의 모습을 보여주길 바랄 것이다.
비록 자신이 마실 와인이 아니더라도 말이다.
내 생각에 그 쇼핑몰의 와인 파트 담당자들은 진심으로 그 와인이 만들어지고 저장되어 있던 지하 셀러를 떠나 배송되어 누군가의 집에 도착하면, 마치 사람이 자신이 태어나고 자란 집을 떠나 차를 타고 멀리 떨어진 곳으로 이사를 하는 것처럼 여행의 피로도 풀고 새로운 환경에 적응할 시간이 필요하다고 생각했을 것 같다.
우리는 이 문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가?
"와인은 살아있다!"
프랑스 유로저널 박우리나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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