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영주권/시민권 문제풀이 제 1회
Question 1-People of the Iron Age sometimes
defended sites called
1)Round barrows
2)Hill forts
3)Skara Brae
4)Hill barrows
철기 시대 방어요세는? 답 2) 언덕
요세
Question 2 -Who defeated the Vikings?
1)King Kenneth MacAlpin
2)King Harold
3)King Edward I
4)King Alfred the Great
바이킹족을 격퇴시킨 왕은? 답 4)
알프레드 대왕
<<영국의
고대사>>
<학습
포인트>
1-로마
침공 이전의 역사
2-영국
사회에 끼친 로마인들의 충격
3-로마군대의
철수 후 영국을 침략한 여러 부족들
4-1066년
노르망 침공의 중요성
<로마식민지 시대>
줄리어스 카이샤르가 로마군단을 이끌고 영국을 침략한 것은 BC 53년이었다. 이 때 정복은 실패로 끝나고 거의 백년 동안 영국은 유럽을 점령한 로마제국과 분리된 채 남아있었다. AD 43년 클라디우스 로마황제가 로마군대를
이끌고 새로운 침략을 감행했다. 이 당시 몇 몇 영국 부족들이 대항을 했으나 영국 전체가 로마군인들에게
점령되었다. 로마인과 대항한 지도자 중에 한 명이 현재 잉글랜드 동쪽에 위치했던 이케니(Iceni)의 여왕, 보우디카(Boudicca)였다. 그녀에 대한 기억이 오늘날에도 전해져 국회의사당 근처 웨스트민터 브리지 위에 그녀의 동상이 세워져 있다.
현재 스코틀랜드 지역은 로마인들에게 점령되지 않았다. 하이드리안 로마황제는픽족(Picts-스코틀랜드인의 조상)을 내쫓기 위해 잉글랜드북쪽에 요새를
갖춘 성벽을 건설했다. 하우스테드(Housestead)와
빈돌랜다(Vindolanda)를 포함한 하이드리안 장벽의 일부가 지금도 남아있다. 이 지역들은 트래킹족들에게 인기가 있으며 유네스코 세계 문화유산으로 등록돼 있다.
영국을 점령한 로마인들은 거의 400년 동안 영국을 지배하며 도로를
닦고 공공건물을 건축하고 법을 만들었으며 새로운 식물과 동물들을 들여왔다. 3세기와 4세기 경에는 영국 땅에 처음으로 기독교인들의 사회가 등장하기 시작했다.
<앵글로 색손>
기울어져가는 로마제국를 지키기 위해 AD 410년 영국을 떠났던 로마병사들은
다시는 돌아오지 못했다. 호랑이가 없으면 토끼가 왕이라고 로마군들이 떠나 무주공산이 된 영국땅을 북유럽
차가운 땅에 살던 주트족, 앵글족과 섹손족등이 침범하기 시작했다. 이들이
사용한 언어가 현재 영어의 기초가 된다. 이러한 침략자들과 본토인들과의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다. 이 당시를 배경으로 한 전설 같은 얘기가 바로 지금의 콘웰지방을 무대로 한 엑스칼리버, 원탁의 기사 등으로 영화화 된 아더왕 이야기다.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음에도 AD 600년 경 앵글로 섹손 왕국이 영국땅(Britain)에 세워지게 된다. 이러한 왕국들의 대부분이 주로 지금의
잉글랜드 지역에 세워졌다. 이
왕들 가운데 한 왕의 무덤이 콘스터블 고향인 서퍽(Suffolk) 지역인 서튼 후(Sutton Hoo)에서 발견되었다. 이 왕은 보물과 갑옷 등과 함께
매장 됐는데 27미터짜리 갤리선에 모두 실려진 채 흙으로 덮여 매장되었다. 7세기 초중반(624년혹은 625년) 경으로 추정되는 왕의 사망과 함께 매장된 보물들은 대부분 대영박물관에 전시돼 있으며 현지 유적지에는 실제 크기의
배 무덤이 전시대 있다. 웨일즈의 대부분과 스코틀랜드는 앵글로 섹손족의 지배를 받지 않았다.
앵글로 섹손족이 처음 영국에 올 때는 이들은 기독교인들이 아니었으나 이 시기 동안 선교사들이 영국에 건너와 그리스도에
대해 설교를 하기 시작했다. 아일랜드에서 건너온 선교사들은 북쪽지역으로 진출했는데 이들 가운데 가장
유명한 선교사가 성 패트릭(St Patrick)으로 아일랜드의 수호 성인이 되었다. 성 콜롬바(St Columba)는 지금의 스코틀랜드 해변에서 떨어진
아이오나 섬에 수도원을 설립했다. 로마에서 선교사들을 이끌고 온 성 오거스틴(St Augustine)은 남쪽지역에 기독교를 전파했는데 그는 나중에 켄터배리 초대 대주교가 되었다.
<바이킹족>
AD 789년 덴마크와 노르웨이에서 건너온 바이킹들이 영국 해안지방을
약탈하더니 잉글랜드 동부와 스코틀랜드 지역에 자신들의 사회를 형성하며 머물기 시작했다. 잉글랜드 앵글로
섹손왕국에서는 알프레드 대왕(King Alfred the Great)을 중심으로 일치단결하여 바이킹들을
패퇴시켰다. 데인법(바이킹 언어에서 유래한 그림즈비와 스컨소프와같은
많은 지역의 이름들)으로 알려진 침략자 바이킹들은 잉글랜드 북동쪽에 머물렀다. 정착 바이킹들은 지역 사회와 융합되고 이들 가운데 상당수가 크리스찬으로 개종하였다.
앵글로섹손 왕들은 덴마크 왕이 지배했던 짧은 기간을 제외하고는 지금의 잉글랜드 지배를 계속했다. 이 왕들 가운데 첫번째 왕이 뉴트왕으로 크누트라고도 불려졌다. 북쪽에서
바이킹들의 침략의 위협은 사람들로 하여금 케네스 맥알핀왕(Kenneth MacAlpin)밑에 일치단결하도록
하였다. 스코틀랜드라는 용어가 그 나라를 묘사하는 용어로 사용되기 시작했다.
<노르망의 정복>
1066년, 노르망디(지금의 북 프랑스)의 윌리엄 공작이 이끄는 침략자들이 잉글랜드 섹손
왕인 하롤드(Harold)를 해스팅스(Hastings) 전투에서
패배시켰다. 해롤드는 이 전투에서 전사했으며 윌리엄 공작은 잉글랜드의 왕이 되어 정복왕 윌리엄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이 해스팅스 전투는 베에우스 자수(Bayeux
tapestry)라고 알려진 수놓기로 기념되고 있으며 오늘날 프랑스에서 여전히 볼 수 있다. 베에우스
자수(Bayeux tapestry)는 70미터 길이(230피트)의 리넨천(아마사)에 채색된 양털(wool)로 수를 놓은 것이다.
노르망의 정복은 잉글랜드 침략의 마지막 성공에 해당하며 이것은 잉글랜드의 정부와 사회구조에 많은 변화를 이끌었다. 새로운 지배층이 사용하는 노르망 프랑스어가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영어에 지대한 영향을 끼치게 된다.
초기에 노르망인들은 웨일즈까지 점령하게 되나 웨일즈인들이 점차적으로 전투에서 승리하여 그들의 영토를 되찾게 된다. 스콧인들과 노르망인들의 전투는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 접경지역에서 벌어져 노르망인들이 국경지역의 몇 몇 땅을
점령하긴 했으나 스코틀랜드 심장부까지는 진격하지 못했다.
정복왕 윌리암은 잉글랜드 전역에 걸쳐 모든 읍과 마을까지 부하들을 보내 그곳에 거주하는 사람들과 그들이 소유한
땅, 그리고 그들이 기르고 있는 가축들까지 모든 품목을 작성토록 하였다. 이책이 둠스대이북(Domesday book)이라 불려진다. 이것은 오늘날에도 노르망 정복 후 잉글랜드 사회에 대한 그림을 전해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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