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와 정치1
역사와 예술과 문화 속에 흐르는 영성
앙리 4세의 1598년 낭뜨 칙령 발표 이후 프랑스 사람은 누구나 카톨릭의 신성 동맹이나 프로테스탄트의 위그노 둘 다 거부할 수 있다고 믿어 왔다.
-조르쥬 베르나노스-
1998년 유네스코에서 낭뜨칙령 400주면 기념행사가 있었다. 프랑스에서 신교도나 구교도가 자유롭게 예배를 볼 수 있도록 허용하였던 역사적인 기념비적인 사건이었던 낭뜨칙령을 돌이켜 보는 이 자리에는 공화국의 대통령과 세 명의 장관 그리고 카톨릭, 유대교, 회교도 종교지도자들이 참석하였다.
당시 대통령 자크 쉬락의 모두 발언에 이어 프로테스탄트 지도자인 장 따르띠에씨는 1598년의 낭뜨 칙령과 1685년의 낭뜨칙령의 폐지령으로
프랑스 프로테스탄트은 지상의 양심의 자유의 척후병이 되었다고 연설하였다. 프랑스 개혁교회의 총재인 미쉘 베르트랑씨는 낭뜨칙령에 포함된 정치와 종교의 분리 원칙에 경의를 표하며 “스스로 절대적이라고 이야기하는 모든 진리에 대하여 우리는 경계를 게을리 하지 말아야
한다”고 말했다.
길 가는 이여 기억하라, 이
낭뜨시에서 프랑스왕 앙리4세기 1598년4월15일 프로테스탄트들에게 종교의 자유를 허하는
영원하고 번복할 수 없는 관용의 칙령에 사인하였다.
왕실의 역사와 교회의 역사
프랑스 역사에서 교회의 역사와 왕실의 역사를 구분 지어 설명하기 어렵고 난감하다. 프랑스 교회와 프랑스 왕실이 상부 상조하며 일반 백성 위에서 신에게 위임 받은 권리를
놀라우리만큼 성실하게 행사하였다는 사실은 이미 역사가 증명하고 있다.
샤를르 마뉴 황제
왕실의 정통성을 부여해 주는 과정에 만들어 지는 왕실 신화는 498년 끌로비스 왕의 세례가 프랑스를 신의 놀라운 계획안에 들어 가게 했다고 기록한다. 그 뒤를 이어 샤를르 마뉴 대제,위그 까뻬왕,필립 오귀스트 왕, 성 루이왕,필립 르 벨 왕들은 크리스찬과 프랑스 인을 동의어로 만들게 한 인물들이다.
프랑스 왕국의 모든 백성들은 왕과 같은 신앙을 가져야 했으며 기름 부음 받고 이 지상에서 하늘의 대리자가 된 왕을 위하여 기도해야 한다는 전통이 중세로부터 왕실의 문을 닫을 때까지 이어졌다.
위그 까뻬의 대관식
앙리4세, 끌로비스 왕
사계절 옥탑방에서 테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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