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디에 홀려버린 시간들
얼마전 땅끝마을이라던 랜즈엔드를 다녀왔다.
제인오스틴의 쵸우턴마을 을 자랑하는 햄프셔와 윌셔를 건너 남쪽으로 도셋과 서머셋을 사이에 두고 데본으로 향할쯤 우리는 이미 낡은 석탄기관차의 늙은 기관사처럼 힘이 쭉 빠져 있었다. 영겁의 세월이 그대로 서있는듯 광활한 히스가 바람을 맞으며 낮게 드리워진 다트무어 에서 마냥 누워 있고만 싶었다. 랜즈엔드의 싸아한 바닷바람과 돌섬사이에서 들려오는 기러기소리는 무었인가……이제는 마지막이라는 생각을 하게 됨은 랜즈엔드라는 이름에서 연유될 것인가? 그럼 저기 멀리 보이는 저곳 마지막에는 무엇이 있단 말인가? 돌아가신 어머님과 아버님을 그곳에가면 뵈울수 있을까? 바퀴에 깔려 형체를 알아볼 수 없었던 그 여자아이도 …. 간경화로 세상을 떠났던 친구도 그곳에 있겠지…. 그녀석은 도봉산줄기에서 쏟아지는 하얀 폭포수에 발가벗고 웃으면서 서있었지…
어쨌든 웨섹스의 토마스 하디가 심어놓은 사과나무의 잘익은 열매를 정신없이 따먹다가 나는 귀향의 크림처럼 내 마음의 언덕으로 돌아와 나를 교화 하고있다.
알렉에게 순수히 몸을 내주는 순진함과 그를 후려치고 살인까지 저지르는 테스의 이중적 유전인자를 발견하고 헨차드에게 돌아왔다.
파프레에게 모든 것을 빼았기고 마지막 순간을 점쟁이에게 의존했던 헨차드의 비극적 종말이 생생하여 뉴몰던 한 귀퉁이에서 밤잠을 설치고 있었다.
에그돈 희스 로 돌아가자
하디의 소설 “귀향”은 1878년 출간. 주인공 크림은 파리의 도시생활을 버리고 에그돈히스의 황야로 귀향하여 마을의 어린이 교육에 진력하면서 자신의 정착지로 삼는다. 한편 이교적인 황야의 여성 유스타시아 는 파리를 동경하여 황야를 탈출할 발판으로 삼고자 크림과결혼한 후 정부와 함께 파리로 도망갈 계획을 세운다. 그러나 그 계획은 실패로 돌아가고결국 황야의 늪에서 투신자살한다는 이야기이다.
소설을 읽다보면 에그돈 히스의 광대한 황야를 무대로 한 생명감 넘치는 정묘하고 독창적인 묘사는 놀라움과 즐거움에 밤을 꼬박 세워야 한다. 자연에 대한 사랑과 운명에 대한 순수한 반응은 이를 능가할 작품은 드물다. 황야인들의 생활을 문란하게 하는 애욕의 묘사나 인간에 대한 관찰도 비범하며 비뚤어진 도시문명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은 물질에 제일 큰 가치를 두고 생활하는 오늘날 현대인들에게는 큰 충격이 아닐수 없다.
“귀향”의 역사적 사회적 배경
빅토리아 시대의 낙관주의적 우주관과 세계관이 붕괴되어갈 무렵 토마스 Hardy는 자기 나름대로의 견해와 사상을 가진 작가였다.
Hardy가 살았던 빅토리아 시대에는 당시 두 주조를 이루었던 민주적 경향과 과학 중심으로 조성된 물질 문명의 변영 속에서 속물 근성과 체면주의가 판을 치는 속된 시대였다. 이런 시대의 윤리관이나 도덕관은 자연 편협해지게 마련이었다. 산업혁명에 따른 물질문명의 번영에 힘입은 대부분의 빅토리아 시대 사람들은 우주와 세계를 움직이며 조종하는 힘을 인간의 의사와 노력여하에 따라 어떤 방향으로 이끌어질 수 있고 믿었다. 즉 인간 삶을 관장하는 신의 힘은 인간의 선악에 따라 거기에 맞는 몫을 부여한다는 것이었다. 또한 진리를 숭상하는 과학 정신이 종교에 작용함으로써 재래 전통 신앙에 대한 회의와 새 신앙에 대한 모색이 틈새에 끼어서 지식인들은 갈피를 못 잡고 자아 분열로 고민하는 소위 근대병의 시대였다. 탐욕은 좋은 것이다라는 생각이 팽배해지고 서서히 교회에 나가는 사람이 줄어드는 현상이 나타나기 시작한다.
“귀향”의 철학적 배경도 살펴보자.
하디는 쇼펜하우어의 영향을 받은 허무주의적 페시미즘으로 그의 생애를 일관하였다. 그가 이러한 비관주의적 자연관을 품게 된 것은 그의 유년기 경험과 그가 살던 당대의 사상가 J. S Mill의 영향에서 비롯된다. Hardy와 Mill에게 자연은 낭만주의자나 낙관주의자의 생각처럼 더 이상 인간의 도덕과 행복의 인도자가 아닐뿐더러 오히려 그 자연 앞에서 인간은 무기력하게 복종하며 결과를 기다릴 뿐이다.
Hardy의 비관주의에서 인간 삶의 진행과 변화는 그 자체의 법칙을 따를 뿐이며 또 그것은 이미 정해진 운명에 의해서 좌우되며 그렇기 때문에 인간의 행복과 불행이 그의 선악이나 의식적인 노력으로 초래될 수 없다. 우주를 섭리하는 힘은 바로 그러한 운명의 힘인 것이다. 이 운명은 신성이나 인성을 갖춘 것이 아닌 일종의 자동적이고 물리적인 작용력을 의미하기 때문에 기독교의 하나님처럼 인간에 대한 사랑이라든지 연민의 정은 있을 수 없다. 따라서 인간의 불행이나 재난에 대해서도 무관심하고 냉담하다. 어떤 사람이 선량하다고 해서 그의 불행이나 재난을 막아주거나 그 처지에 동정하지 않는다. 인간이 선으로 된 노력을 모아서 그 힘을 돌려보려고 해도 그것은 이미 정해진 궤도를 벗어나지 않는다. Hardy의 이러한 운명의 힘은 흔히 '내재의지'라고 불린다. 이것은 무의식적으로 맹목적이기 때문에 그 지배하에 있는 인간의 어떠한 노력이나 야심도 모두가 좌절되지 않을 수 없다.
다음주에 우리는 소설 “귀향”을 좀더 구체적으로 접근하여 하디의 초자연적 내면의식과 하디가 말하는 팔자를 다시한번 고찰해 보도록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