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홉번째 이야기 - 찰즈디킨스와 그의 작품세계

by 유로저널 posted Sep 15,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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찰즈 디킨스는 일반적으로 영국이 낳은 가장 위대한 소설가로 인정되며 생전에도 이전의 그 어떤 작가보다 폭넓은 인기를 누렸다. 그의 작품들은 소박한 평민이나 교양있는 사람들, 빈민이나 여왕을 막론하고 호소력을 가졌고, 작품성뿐만 아니라 당시의 과학기술의 진보가 그의 명성을 빠른 속도로 널리 알리는 데 기여했다. 그의 긴 작가 경력을 통해 발표된 작품들은 각기 판매부수나 비평적 평가에서 큰 차이를 보이고 있지만 그 어느 작품도 디킨스 특유의 경향에서 완전히 벗어나 있지는 않다. 현대에 와서는 그 관점과 전개의 탁월함으로 높은 평가를 받고 있는 작품도 당대에는 크게 주목을 받지 못한 적도 있으나 그는 지속적 인기를 누려왔고 문학사적 위치 또한 그 어느 때보다도 높다. 디킨스는 영국작가들 중에서 가장 희극적인 작가임과 동시에 출중한 예능인이었다. 당시 사회와 부조리에 대한 이해의 범주 및 그가 지닌 연민과 명석한 두뇌는 그의 소설을 더욱 풍요롭게 했을 뿐만 아니라 그를 19세기 문학의 위대한 힘이자 시대의 양심을 대변하는 영향력있는 작가로 만들었다. 디킨스는 포츠머스에서 태어났으나 유아시절에 그곳을 떠나 가장 행복했던 유년시절을 채텀에서 보냈는데(1817~22), 그곳은 후에 그의 소설에 자주 등장하게 된다. 1822년부터 계속 런던에서 살다가 1860년경에 채텀 근교에 있는 전원주택 개즈힐에 정착했다. 중류층 출신의 영국해군 경리국 사무원이었던 아버지는 상당한 봉급을 받았으나 사치와 낭비가 심해 가족은 재정적으로 항상 궁핍한 지경에 처해 있었다. 그의 재정적 실패와 소비성향의 일부는 다분히 자서전적인 경향이 있는 〈데이비드 카퍼필드 David Copperfield〉에서 미코버라는 인물로 각색된다. 1824년 디킨스 가족은 완전히 재정적 파탄상태에 이르렀다. 큰아들 찰스는 학교를 중퇴하고 공장의 수공업 노동자로 일하게 되었고 아버지는 채무관계로 인해 감옥에까지 가게 되었다. 이러한 충격적인 사건들은 어린 디킨스에게 깊은 영향을 미쳤다. 짧은 기간이나마 노동자계급으로의 전락은 돌이키기 싫은 경험이었으나 가난한 이들의 삶과 고통에 대해 배우고 이해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또한 감옥의 이미지나 상실과 억압 속에서 방황하는 어린이의 이미지가 많은 소설 속에서 되풀이하여 등장하게 되었다.

디킨스의 성격과 예술에 나타나는 여러 가지 다른 요소들도 이 시기에 형성되었는데, 여기에는 20세기 소설가 앵거스 윌슨이 주장하듯이, 디킨스가 후에 한 남자로서, 또는 작가로서 여성을 이해하는 데 어려움을 보인 것도 포함된다. 이런 성향의 원인을 추적해보면 당시 그가 느끼기에 자신의 고통을 이해하지 못하고 공장에서 돈을 벌어 오기만을 강요했던 어머니에 대한 심한 분노에서 비롯된 듯하다. 아버지의 출옥과 함께 다시 시작된 디킨스의 학교생활은 결국 15세에 끝나게 된다. 그는 변호사 사무실의 서기로 취직했다가 법정의 속기사가 되는데 그의 소설에 자주 등장하는 법률세계에 관한 지식은 여기에서 얻어진 것이다. 그러다가 의회 및 신문사 기자가 된 그는 저널리즘에 대한 지속적인 애정과 법조계 및 의회에 대한 경멸감을 동시에 갖게 되었다. 개혁기였던 1830년대에 성년이 되고, 특히 자유공리주의계의 〈모닝 크로니클 Morning Chronicle〉지에서 일한(1834~36) 경험은 그의 정치적 견해에 큰 영향을 미쳤다. 당시 그에게 일어난 또다른 중요한 사건은 마리아 비드넬에게 구혼했다가 그의 가문과 불투명한 미래 때문에 거절당한 일이었다. 그녀와 결혼하고 싶은 희망과 그녀를 잃은 데 대한 분노는 성공에 대한 결의를 더욱 부채질했다. 당시 마리아에 대한 감정과 뒤에 다시 그의 인생에 짧게 개입하여 환멸감을 주는 그녀의 모습은 데이비드 카퍼필드의 도라 스펜로에 대한 동경과 〈어린 도릿 Little Dorit〉에 나오는 중년의 아서 클레넘이 한때 매혹적으로 보였던 를로라가 "주책맞고 어리석다"고 느끼며 "백합인 채 남겨두었던 플로라가 작약이 되어 있었다"고 표현한 데서 잘 나타나 있다.

연극에 많은 매력을 느낀 디킨스는 1832년 거의 직업배우의 길을 택할 뻔하기도 했다. 1833년 그는 잡지와 신문에 단편소설과 수필들을 기고하기 시작했는데, 이들은 많은 관심을 끌어 1836년 2월 〈'보즈'의 스케치집 Sketches by 'Boz'〉이라는 제목으로 다시 출간되었다. 같은 달에 그는 한 유명한 화가의 판화와 함께 실을 희극 연재물을 청탁받았다. 그로부터 7주 후에 〈피크위크 클럽의 기록 Pickwick Papers〉 연재물의 1회분이 나왔다. 〈피크위크 클럽의 기록〉은 몇 달만에 폭발적인 인기를 누리게 되고 디킨스는 일약 당시의 최고 인기작가가 되었다. 신문사 일을 그만두고 월간지 〈벤틀리 미셀러니 Bentleys Miscellany〉의 편집을 시작하면서 그는 〈올리버 트위스트 Oliver Twist〉를 연재하여(1837~39) 매달 2가지의 연재물을 쓰게 되었다. 1836년 4월 스코틀랜드 저널리스트이자 학자이던 조지 호가스의 장녀 캐서린과 결혼했던 그에게는 이미 그의 9명의 아이들 중 첫번째 아이가 태어난 때였다. 이때부터 수년간 그의 인생은 계속 분주하고 빠른 속도로 지속되었다. 연재물 형식의 글이 자신의 기호에도 맞고 재정적 보탬이 된다고 판단한 그는 〈니콜러스 니클비 Nicholas Nickleby〉(1838~39)를 〈피크위크 클럽의 기록〉과 같은 양식으로 20회에 나누어 썼고 또다시 〈골동품 가게 The Old Curiosity Shop〉(1840~41)와 〈바너비 러지 Barnaby Rudge〉(1841) 등을 더 짧은 분량의 주간물로 썼다. 결국 과로에 지친 그는 5개월 동안 미국을 여행했는데, 그의 문필적 지명도 덕분에 거의 왕실의 칙사대접을 받았다. 그러나 이 와중에도 미국의 저작권 보호법 부재에 항의함으로써 국민감정을 유발시키기도 했다. 영국의 제반 제도를 과격하게 비판했던 그는 '나의 상상 속의 나라'로부터 많은 것을 기대했으나 권장할 만한 사회제도보다는 저속함과 혐오스러울 만큼 약삭빠른 관행 등을 발견했다고 했다. 이러한 감정의 일부는 〈미국 인상기 American Notes〉(1842)와 〈마틴 처즐윗 Martin Chuzzlewit〉(1843~44)에도 잘 나타나 있다.


(세익스피어 여행사 강영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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