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에서 수십 년 살아오신 영국 이민 선배님들이 보셨을 때는 별 것 아닐 수도 있겠지만, 지난 날의 나처럼
이제 막 영국에 첫 발을 내딛는 이들이 바라보기에는 내가 영국에서 보낸 9년이라는 시간이 엄청나 보일 수도
있을 듯 하다.
나 역시 유학생 신분으로 영국에 막 도착했을 때는 영국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괜히 대단해 보였다. 영국에서 직장을
다니는 사람들, 영국에서 운전하는 사람들, 여하튼 나보다 먼저 영국에
온 사람들이 하고 있는 모든 것들이 대단해 보이고 부러웠다.
그리고, 나는 과연 영국에서 하루 하루를 어떻게 살아나갈 지, 영국행이라는 나의 선택으로 인해 훗날 어떤 미래를 맞이하게 될 지 도무지 예측하기가 어려웠고, 그래서 설레이기도 했지만 솔직히 설레임보다는 두려움이 더 컸던 것 같다.
비록 내가 지금 어떤 대단한 삶을 누리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이렇게 살아가게 될 줄 알았더라면 그
시절에 조금은 더 편한 마음으로 조금은 더 즐겁게 지냈을 텐데, 그렇게 못했던 게 아쉽고 후회스럽다.
그 누구의 삶이든 원래 인생은 들여다보면 다사다난하지 않은 인생이 없지만, 매일 매일이
모험인 타향살이는 유독 더 그렇다. 영국에서 보낸 지난 9년을 돌아보니
나의 삶 역시 무척이나 다사다난 했다.
도무지 앞이 보이지 않았던 순간 순간들을 도대체 어떻게 지나온 것일까? 아무리 생각해봐도
나처럼 별 볼 일 없는 사람이 여기까지 왔다는 것은 정말 기적이다. 하늘의 도우심이 아니었다면 정말 한 발자국도
나아가지 못했을 터, 그저 감사하고 또 감사해야 할 것 같다.
그런데, 그럼에도 신기한 것은 여전히 삶은 앞이 잘 보이지 않는다. 여전히 두려운 것들이 많고 고민 거리도 많다. 삶의 과제를 하나 끝내놓고 나면 여지없이 또
다른 삶의 과제가 기다리고 있다. 이민 생활의 한 단계, 한 단계를
힘겹게 지나왔건만, 야속하게도 또 다음 단계가 험난한 모습으로 찾아온다.
앞서 언급했듯 영국 생활 초창기에는 앞날에 대한 두려움이 컸고, 그래서 지금은
그 때를 돌아보며 좀 더 편한 마음으로 좀 더 즐겁게 지내지 못했던 것을 후회하는 것처럼, 세월이 흐른 뒤에는
또 지금의 순간들을 돌아보며 그 때 좀 더 편안한 마음으로 즐겁게 삶의 과제들을 마주할 걸 하면서 후회하게 되려나?
어떤 사람들은 자신이 외국에서 사는 이민자라고 한국에 가면 거들먹거리기도 한다는데, 나는 오히려
그 반대여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민 생활을 하면 할수록 나 자신의 단점과 한계를 더욱 처절히 깨닫게 되고, 그래서 무엇
하나 내 힘으로 할 수 있는 게 없고 내 뜻대로 흘러가는 일이 없다는 것을 배워가면서 더욱 겸손해져야 하는 게 정상이다.
원래 열심히 노력하고 인내하여 어렵게 결실을 거둔 사람은 결코 그 결실을 가볍게 자랑하지 않는 법이며, 그가 거둔 결실이
대단한 것일 지라도 결코 그는 교만하지 않다.
그러나, 어떤 요행이나 잔머리, 혹은 엄청난 운을 통해 쉽게
결실을 거둔 사람은 그 결실을 자랑하지 못해 안달이며, 교만이 하늘을 찌르게 된다.
이민 생활 역시 마찬가지인 것 같다. 한 단계, 한 단계
정말 어렵게 헤쳐온 사람은 자랑할 것이 없고 교만할 일이 없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 사람의 삶을 존중하고
존경한다. 그 사람이 어떤 대단한 부와 명예를 이루었기 때문에 아니라, 그렇게 겸손하고 성실하게 이민 생활을 해왔다는 사실 만으로.
반대로 정의롭지 못하게 혹은 성실하지 않으면서 이민 생활에서 그야말로 대박을 거둔 사람은 늘 자랑을 일삼고 교만이
넘쳐 흐른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 사람이 이민 생활을 통해 아무리 대단한 부와 명예를 이루었더라도 그 사람을 경멸한다.
나 역시 그렇게 여러 이민자들을 보면서 누군가를 진심으로 존경했고, 또 누군가를
경멸했다. 그리고, 이제 과연 나는 어떻게 이민생활을 해왔는지,
또 그것을 통해 나의 인품은 어떤 향기를 드러내는 지 스스로를 돌아보게 된다.
이제 막 영국에 도착한 이들, 특히 부푼 꿈을 안고 영국에서 도전하고자 하는 젊은이들에게 그래도 영국에서
10년차를 맞이한다는 나는 과연 어떤 이민자의 모습으로 비쳐질 지, 그래도 그들에
비해서는 영국에서 안정된 삶을 누리고 있다고 감히 조금이라도 교만하거나 불성실한 모습을 보이지는 않는 지...
내가 영국에서 얼마나 더 살아가게 될 지는 오직 하늘만이 알고 계시겠지만, 이렇게 영국에서
이민자로 살아가는 동안 나는 정말 부끄럽지 않은 삶을 살았노라고 감히 스스로에게 자부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어떤 커다란 업적을 거두지 않았더라도, 대단한 부와 명예를 누리지 않았더라도, 누군가가 나를 만나고 나와 이야기하다 보면 내가 하루 하루 진실되고 성실하게 살아온 사람이라는 것을 느낄 수 있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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