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날에 어느 정승이 자식 없이 지내다가 느지막이 딸 하나를 얻었다. 얼마나 예쁘고 사랑스러운지…….! 어느 덧 세월이 흘러 딸이 혼기가 차, 정승은 섭섭하지만 딸을 어느 고을 사또의 막내아들과 혼인시켰다. 이제 정승은 보고 싶은 딸을 일 년에 딱 한 차례 볼 수 있었다. 사돈인 사또의 생일날 친척들과 다른 사돈들이 전부 모이는데, 그날 가야 딸을 볼 수 있었다. 사또에게는 아들이 많아서, 생일이 되면 여러 관직에 있는 사돈들이 자기를 과시하기 위해 나졸들을 거느리고 깃발을 펄럭이며 성대하게 찾아 왔다. 그런데 정승은 혼자서 조랑말을 타고 왔다. 정승 딸 동서들이 보니 정승이라고 해도 별 볼일 없으니까 그 때부터 정승 딸을 무시하기 시작했다. 정승 딸은 막내며느리에다 무시까지 당하니, 설움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다음 해에도 정승은 초라하게 조랑말을 타고 왔는데, 돌아가는 아버지에게 딸이 ‘내년에는 행차를 성대하게 해서 오시라’고 부탁했다. 정승이 알겠다고 하여, 정승 딸은 ‘내년에는 ...’하며 1년이 지나기를 손꼽아 기다렸다. 드디어 사또의 생일이 되었다. 다른 사돈들은 며칠 전부터 성대하게 차려서 오는데, 정승은 생일날이 되어도 오지 않았다. 딸은 ‘나졸들이 너무 많아 늦는가?’하며 초조하게 기다렸다. 오후가 되자 비가 부슬부슬 내리는데, 저녁때쯤 “정승 오신다!”하는 소리가 들렸다. 딸이 부엌에서 일하다가 얼른 내다보니, 이럴 수가! 그토록 부탁했건만 아버지는 여전히 조랑말을 타고 혼자 왔는데, 비까지 맞아 물에 빠진 생쥐 꼴이었다. 딸은 그만 힘이 풀려 쓰러지고 말았다. 정승이 수건으로 몸을 닦은 후 자리에 앉으니, 모두 둘러앉았다. 정승은 이제 딸이 와서 인사하기를 기다리는데 도무지 나오질 않았다. 무슨 일이 있는지 걱정도 되지만 사돈에게 물을 수도 없고.... 그러다가 주위를 둘러보니, 다른 사돈들의 행차가 성대했다. 그제서야 딸의 당부의 의미를 기억한 정승이 “으흠!”하고 크게 헛기침하면서 “자네들이 나와 같이 앉아 있지만, 국법으로는 그리 못해!”하였다. 그러자 다른 사돈들이 하나 둘 마당으로 내려가서 꿇어 엎드리는데, 때는 이때다 하고 비가 쫙쫙 쏟아졌다. 이제 난리가 난 곳은 부엌이었다. 정승 딸을 구박하던 동서들이 그 광경을 보고, 방에 누워 있는 정승 딸을 황급히 찾았다. 많이 아프냐며 다리를 주무르고, 꿀물을 타오고.... 정승 딸이 어안이 벙벙해 일어나 밖을 보니, 어른들이 한마당 널브러져 있었다. 동서들이 옆에서 “우리 아버님은 신경통이 있어서 비를 맞으면 안 되는데...”하고 사정했다. 알았다며, 머리를 손질하고 아버지께 나가 큰절을 올렸다. 정승이 얼마나 반가운지... 아무 일 없는 것처럼 안부를 물은 후, 정승이 “이제 됐으니 가서 일 보거라.”하니, 딸이 “저희 동서들 아버님들이...”하였다. 그러니까 정승이 마당을 내려다보면서 “아니, 왜 자네들이 왜 거기 있는가? 이리 올라오지 않고” 하였다. 그제야 모두 “황공무지로소이다!”하고 위로 올라왔다.
쉽게 드러나는 힘은 과시하는 것이어서 거기엔 별 능력이 없다. 진정한 힘은 숨겨져 있다. 많은 사람들이 자기를 과시하다가 얼마나 많은 낭패를 당하는가! 과장된 자신 말고 실속 있는 자신을 돌아보는 지혜가 필요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