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재: 유로저널 535호 (2005년 8월26일)
(편집자주: 현재의 유럽을 올바르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유럽통합을 제대로 알아야 한다. 정치.경제.사회.문화 등 각 분야에서 진행되고 있는 유럽통합의 다양한 모습을 이해하는 길은 유럽을 알기위한 첫 걸음이다. 유로저널은 케임브리지대학교에서 유럽통합을 전공하고 있는 필자가 기고하는 유럽통합 관련 특집을 연재한다.)
일상생활을 통해 본 유럽통합 (1)
“유럽 몇개국을 방문했다. 영국, 독일, 프랑스 등 각 나라 사람들의 사고방식과 일처리가 아주 다르더라. 이런데도 유럽통합이 되었나? 대체 통합이 무슨 의미인가?”
최근 필자와 대화를 나누었던 한 동료 유학생이 던진 질문이다. 얼핏 보기에 평범하면서도 그 속에 핵심이 들어있는 질문이다.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을 시작으로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흔히 체험하고 있는 유럽통합을 이해해보자.
우선, 통합의 사전적 의미는 “각 부분이 하나의 전체를 형성하는 과정”이다. 유럽통합에 이를 적용해보면 각 부분 (유럽연합에 가입한 영국, 프랑스, 독일, 폴란드 등 각 회원국)이 하나의 전체 (유럽연합이라는 또 하나의 연방국가, 혹은 영국의 보수언론이 흔히 표현하듯이 브뤼셀에 있는 국가위의 국가, ‘초국가’ [Superstate])를 이루는 과정이라고 볼 수 있다. 필자의 동료가 제기한 질문에도 통합에 관한 이런 정의가 바탕을 이루고 있다.
그러나 통합은 비단 이런 의미로만 사용되고 있지는 않다. 경제통합을 이야기할 때는 유럽연합 각 회원국이 단일시장을 이루고 있다는 의미로도 사용된다. 이처럼 다양한 의미를 지닌 통합을 경제.정치.사회 등 분야별로 그 뜻을 정의해본다. 이런 과정속에서 우리가 실생활에서 겪는 통합의 실체도 알 수 있다.
경제통합: 단일시장과 단일화폐
지난해 5월1일 중.동부 유럽의 10개 나라 (폴란드, 체코, 헝가리, 슬로바키아, 슬로베니아, 발트 3개국, 몰타, 키프로스)가 유럽연합 (EU)의 회원국이 되었다. 이로써 EU는 25개 회원국에 4억5천만명의 인구를 거느린 세계 최대의 경제블럭이 되었다. EU 25개국은 세계 총생산의 20%를 넘게 생산, 미국과 일본의 생산량을 앞지르고 있다. 또 영국과 덴마크, 스웨덴을 제외한 12개 회원국 (독일, 프랑스, 이탈리아, 베네룩스 3국, 그리스, 포르투갈, 스페인, 핀란드, 오스트리아, 아일랜드)에서 단일화폐 유로가 사용되고 있다. 이처럼 경제통합의 실체는 가시적이다.
예컨대, 영국에서 다른 유럽연합 회원국으로 제품을 수출한다고 가정해보자. 회원국간의 거래이기 때문에 관세가 없다. 또 제품뿐만 아니라 보험과 투자 등 서비스도 각 회원국에서 제한없이 제공할 수 있다. 이와함께 자본과 노동력도 자유롭게 이동한다. 각 회원국 시민들은 다른 회원국에 가서 비자없이 일자리를 구하고 정착한다. 또 자치단체 의회 (지방의회)와 유럽의회의 선거권과 피선거권도 누린다. 즉 스페인 사람이 독일에 가서 비자없이 일자리를 구하고 살고 있는 독일 시의 시의회 의원으로 출마하거나 선거권을 행사할 수 있다. 그러나 지난해 가입한 중.동부 유럽 10개국 시민의 경우, 보통 5년에서 7년간 기존 회원국으로의 자유이동이 제한된다. 즉 폴란드 사람이 독일로 와서 비자없이 일자리를 구하고 거주하는 일이 이 기간동안 불가능하다. 만약에 가입직후 부터 이런 자유이동을 허용했다면 수십만명의 폴란드 사람들이 독일로 이주, 정착했을 것이다. 독일의 복지수준이 폴란드보다 몇배 높다. 폴란드에서 버스나 기차를 타고 보통 2-3시간이면 독일에 도착한다. 대다수의 회원국이 독일처럼 신규 회원국 시민의 자유이동을 제한했다. 그러나 영국은 신규 회원국 시민의 자유이동을 허용했다. 시장원리에 따라 고용주들이 자유롭게 노동력을 고용할 수 있다는 논리를 내세웠다. 이 때문에 많은 폴란드나 체코 사람들이 영국으로 와서 합법적으로 일하고 있다. 필자가 거주하고 있는 있는 케임브리지 슈퍼마켓에도 이미 몇명의 동구권 시민들이 일하고 있다. 경제통합이 되지 않은 우리나라와 미국, 중국, 혹은 일본간의 교역이나 방문의 경우와 비교해보면 경제통합의 진전을 금방 알아차릴 수 있다. 이들 3개국은 우리나라의 주요 교역 상대국이지만 관세가 있고 여행을 하려고 해도 비자를 받는 등 절차가 까다롭다.
12개 회원국이 사용하고 있는 유로는 경제통합의 또 다른 단면이다. 독일이나 프랑스 등 이들 유로 가입국에서는 자국화폐가 없다. 대신 유로라는 단일화폐가 통용된다. 또 독일의 프랑크푸르트에 있는 유럽중앙은행 (ECB: European Central Bank) 에서 단일 이자율을 정한다. 이 이자율이 유로를 채택하고 있는 12개 나라에 단일 적용된다. 이처럼 단일화폐는 단일시장보다 훨씬 진전된 경제통합의 한 과정이다. 보통 역사를 보면 여러개로 나뉘어진 국가들이 통일된 후 단일화폐를 채택했다. 독일은 수십개의 크고 작은 군주국가로 나뉘어졌다가 프로이센 주도로 1871년 통일이 되었다. 독일 통일을 앞당긴 것은 관세동맹이었다. 1834년 독일내 수십개 군주국가들이 관세동맹을 결성, 회원국간에 관세없이 제품을 수출했다. 이어 가격을 청산할 때에는 보통 각 회원국이 발행한 서로다른 독일 마르크를 환율을 정해 결제했다. 당시 프로이센이 가장 큰 회원국이었기 때문에 보통 프로이센이 발행한 1마르크가 소회원국에서 발행된 마르크보다 가치가 훨씬 높았다. 그러나 1871년 통일후 독일은 제국 마르크라는 단일 화폐를 사용하기 시작했다. 미국 등 다른 나라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이와 비교해보면 유로는 정반대 과정을 거치고 있다. 즉 독일과 프랑스 등 각 회원국이 정치적으로 통합되지 않고 엄연히 존재하는 데 단일화폐를 채택했다. 유로화 출범이 사상 유례가 없는 독특한 실험임을 입증해주고 있다.
정치통합: 공동외교안보정책과 내무.법무분야 협력
위의 예에서 볼 수 있듯이 경제통합은 많이 진전되었고 그 실체를 분명하게 알 수 있다. 그러나 경제통합과 비교, 정치통합은 진전이 더디다. 각 회원국을 구속하는 새로운 기구를 만들고 이 기구의 의사결정방식이 만장일치에서 다수결로 이행되는 것은 많은 시간을 요한다.
우선 외교안보분야를 보면 각 회원국은 주요 국제문제에 대해 공동입장을 취하고 공동행동을 취하도록 노력한다. 각 외무부. 국방부간에 활발한 의사교환과 정보교환이 이루어진다. 그리고 각 회원국 외무.국방 장관들이 모이는 각료이사회에서 주요 국제현안을 논의하고 공동입장을 취한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노력하며 서로에게 압력을 행사하는 정도다. 즉 국익이 상충할 때에는 독자적인 행동을 취할 수 있다. 가장 두드러진 예가 지난 2003년 3월 미국 주도의 이라크 침공때 주요 회원국이 취한 정책이다. 영국은 미국과 공동보조를 취해, 이라크를 침공하는 것이 국익이라 여겨 미국과 함께 이라크를 침공했다. 반면에 초강대국 미국을 유럽을 통해 견제하는 드골주의 외교정책을 취해온 프랑스는 독일과 함께 이라크 침공을 반대했다. 공동외교안보정책이 어디까지나 회원국간의 합의를 바탕으로 하고 있기 때문에, 주요 회원국간의 극명한 정책차이가 드러났다. 국가주권의 핵심인 외교와 국방분야는 통합이 더딜 수 밖에 없다.
단일시장의 형성으로 내무.법무 분야의 협력은 상당히 진척되었다. 80년대 유럽 각 국을 여행해본 사람이라면 국경통제가 있었음을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독일에서 차를 몰고 이웃 프랑스로 간다 하더라도 국경에서 여권을 보여주고 차량을 검색당했다. 그러나 1993년 1월1일부터 각 회원국간에 이런 국경통제가 사라졌다. 현재 대륙을 차를 몰고 여행하면 어디가 국경인지 알 수가 없다. 기차를 타고 가도 마찬가지이다. 국경없는 단일시장을 이루고 각 회원국 시민이 자유롭게 이주하다 보니 당연히 이를 틈탄 범죄가 문제가 됐다. 한 회원국에서 범죄를 저지르고 다른 회원국으로 도주했을 경우 체포와 인도의 문제, 그리고 이럴 경우 범인이 일시 체류하고 있는 상대국가와의 내무.법무 분야 협력이 필수적이 되었다.
특히 2001년 9.11 테러이후 유럽각국은 공동체포영장의 도입을 서둘러 지난해말부터 이를 시행하고 있다. 테러와 돈세탁, 인신매매 등 주요 범죄의 경우 한 회원국이 발행한 체포영장을 다른 회원국에서도 인정, 사법.내무당국이 범죄용의자를 신속하게 인도한다. 과거 범죄인 인도가 정치적 결정에 의해 좌우되고 시간이 많이 걸렸던 점과 비교하면 내무.사법분야의 협력이 진전됐음을 알 수 있다.
사회.문화분야 통합: 인적교류와 다양성
마지막으로 사회.문화 분야의 통합은 인적교류가 늘어난 점을 들 수 있다. 각 회원국 대학생들은 보통 에라스무스 프로그램에 신청, 원하는 회원국 대학교에서 1년정도 공부를 한다. 유럽연합 예산지원을 받고, 각 대학교에서 수강한 과목의 학점을 인정받는다. 영국의 여러 대학교에서 공부하고 있는 독일, 프랑스, 스페인 등 다른 나라 회원국 학생의 경우 이 프로그램의 지원을 받은 학생이 많다. 비단 학생교류뿐만 아니다. 회원국 시민들이 거주이동의 자유가 있기 때문에 여행을 많이 한다. 영국인들은 주로 여름에 남부 프랑스 지역이나 스페인으로 여행을 간다. 독일인들은 인근의 체코나 이탈리아 지역으로 차를 몰고 여행을 간다.
수많은 교류를 통해 회원국 시민들이 서로의 문화를 더 잘 이해하고 교류를 넓힌다. 이런 과정속에서 유럽이 하나임을 느끼면서 또 차이점을 발견하고 이해하도록 노력한다 (통합속에서의 다양성). 또 차이점을 이해하면서 미국인, 혹은 아시아인과는 다른 유럽인이 하나임을 느낀다 (다양성속에서의 통합). 유럽연합 기구 가운데 행정부 역할을 하는 집행위원회의 예를 들어보자.
2만명이 넘는 공무원들이 브뤼셀에 있는 집행위원회에서 자국의 이익이 아닌 유럽의 이익을 위해 일하고 있다. 이들은 엄격한 공채를 통해 선발된 엘리트 공무원들이다. 이들이 결정하는 주요 업무와 회의는 모든 회원국 언어로 통.번역 되어야 한다. 집행위원회 직원의 10% 정도가 전문 통.번역가이다. 유엔같은 국제기구의 경우 공용어가 정해져 있어 이 언어로만 통.번역이 된다. 얼핏 보기에 비용절감과 업무의 효율성만을 따진다면 유럽연합도 다른 국제기구처럼 영어와 프랑스어, 혹은 독일어 정도를 공용어로 정해 이 언어로만 통.번역하면 어떨까하는 생각을 가질만하다. 그러나 유럽연합은 문화의 다양성을 존중한다고 규정했다. 유럽 각국은 고대 그리스.로마 문화와 기독교라는 유산을 공유하고 있다. 그러나 수백년간 다른 환경에서 독특한 문화를 이루어 살아왔다. 그렇기 때문에 문화의 다양성을 존중하는 가운데 유럽이 하나임을 강조해오고 있다. 얼핏 보기에 양자는 모순되는 듯 하다. 그러나 위에서 설명했듯이 유럽연합이 추구하고 있는 사회.문화분야 통합의 독특한 특성이기도 하다.
경제.정치.사회.문화 분야의 통합은 상이한 정책과 속도를 거쳐 통합을 이루어 왔다. 다음 호에서는 통합사를 통해 각 분야의 발전과정을 살펴보기로 한다.
안 병 억 (anpye@hanmail.net)
연합통신. YTN 기자
케임브리지 대학교 역사학부 석사 (유럽통합 전공)
현재 동교 박사과정 (유럽통합전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