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생활을 통해 본 유럽통합 (4) 독일 통일과 단일화폐

by eunews posted May 30,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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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호에서는 각 회원국간에 단일시장을 형성하기위한 과정을 알아보았다. 또 단일시장이 단일화폐를 필요로하는가 하는 근본적인 문제를 제기했다. 이번에는 경제통합의 아주  발전된 단계인 단일화폐 도입에 대해 자세히 알아보자.

                 독일통일과 단일화폐
     한 역사학자는 “독일은 유럽대륙에는 너무 크고 강대국이 되기에는 너무 작다”라는 말을 했다. 또 1950년대 북대서양조약기구 (나토)의 초대사무총장을 지낸 영국의 이스메이경 (Lord Ismay)은 “나토는 소련군을 유럽에서 몰아내고, 미국을 유럽에 불러들이고 독일의 힘을 빼놓기위해 창설되었다” (To keep the Russians out, the Americans in and the Germans down)라며 나토의 임무를 설명했다. 두 인용구 모두 독일문제가 무엇인가를 알 수 있게 해준다. 19세기말 식민지 쟁탈전에 뒤늦게 합류한 독일은 아프리카에서 식민지 획득을 두고 기존 패권국이던 영국, 프랑스와 경쟁한다. 이른 1차대전 발발의 중요한 원인이 됐다. 독일은 1차대전 개전에 대한 책임을 지고 엄청난 전쟁배상금을 물어야했고 영토도 빼앗겼다. 그 결과 대공황과 히틀러가 집권했다. 2차대전중 사상 유례없이 6백만명의 유대인이 살해되었고 종전 후 독일은 서독과 동독으로 분단되었다. 비록 분단이 부자연스러웠지만 주변국들은 독일의 분단을 내심 반기었다. 패권을 휘두르며 유럽의 평화를 짓밟았던 독일. 그 독일문제가 잠정적으로나마 해결되었기 때문이다. 또 지난 2회에서 설명했듯이 유럽통합의 전기가 된 석탄철강공동체 (ECSC)도 독일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방책이었다. 즉 전쟁수행에 필수적인 전략물자인 석탄과 철강을 회원국이 공동으로 관리, 전쟁재발을 방지하자는 것이었다. 독일과의 전쟁에서 패배한 프랑스가 이 기구의 설립에 주도적인 역할을 한 이유도 이를 설립하면 독일을 잠정적으로나마 제어할 수 있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이처럼 수면하에 있던 독일문제. 그러나 이 문제가 다시 불거져나왔다. 1988년과 1989년 폴란드와 헝가리를 필두로 동구권이 다당제 선거를 도입했다. 1985년 소련공산당 서기장에 취임한 고르바초프의 개혁정책으로 동구권이 민주화를 이루어낼 수 있었다. 그러나 동독은 동구권 가운데 드물게 고르바초프의 개혁을 비판하며 반동적인 정책을 실시했다. 하지만 동독내 교회를 필두로 하는 시민단체가 여행자유화를 요구하며 줄기차게 시위를 벌였다. 결국 28년간 동서독을 가로질렀던 베를린 장벽은 1989년 11월9일밤 무너졌다.
     콘크리트 장벽이 무너지고 그 장벽위에서 만난 동서독 국민이 눈물을 흘리는 장면이 CNN 등 주요 방송을 통해 전세계에 전달되었다. 프랑스와 영국 등 유럽각국은 공식적으로 베를린 장벽 붕괴를 환영했다. 그러나 마음속으로는 독일통일이 점차 가시화하는 것에 대해 불안감을 느꼈다. 당시 서독의 인구는 6천만명이 조금 넘었고 동독은 2천만명 정도였다. 서독 만으로도 유럽공동체 회원국 가운데 최대 경제대국이다. 그런데 통일이 되면 2천만명의 인구가 더 늘어난다. 그리고 당시 동독은 동구권 가운데 가장 잘 사는 나라라고 평가되었고 서독과의 경제적 격차도 그리 크지 않다고 인식되었다 (통일후 이런 평가는 사실이 아님이 밝혀졌다. 동독경제는 이미 장벽 붕괴이전에 파탄상태이었다. 공산국가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통계조작의 문제이다).
     당시 프랑스와 영국의 일부 정치지도자들이 지녔던 독일통일에 대한 우려는 곧 그들의 행보로 나타났다. 프랑스의 미테랑 대통령은 장벽붕괴 한달후인 1989년 12월 동독을 방문했다. 그리고 “유럽에서 세력균형이 중요하다”며 “이런 상황을 바꾸려는 정책은 위험하다”는 발언을 서슴치 않았다. 당시 헬무트 콜 서독 총리가 적극적인 통일정책을 취하자 이를 경고한 것이다. 또 마가렛 대처 영국총리도 미테랑 대통령과 만나, 독일 통일을 저지하기위해 프랑스와 영국이 힘을 합치자고 합의했다. 그러나 아무리 두 나라가 힘을 합쳐도 현실적으로 독일 통일을 저지할 수가 없었고 또 저지할 명분도 없었다. 또 무엇보다도 미국은 독일 통일을 지지했다. 서독을 신뢰할만한 나라로 여겼고 통일독일이 나토회원국으로 남는한 미국의 유럽전략은 변화가 없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결국 프랑스는 독일 통일을 지지하는 대가로 독일 마르크화를 포기하고 단일화폐 도입을 앞당기는 정책을 밀고 나갔다. 지난 호에서 설명했듯이 1989년 상반기에 각국 정상들은 단일화폐 도입에 관한 보고서를 채택했다. 그러나  언제 무슨 과정을 거쳐 단일화페를 도입할지는 미지수로 남아있었다. 독일 마르크화가 지배하고 있던 통화패권을 유럽각국이 나누어 행사하는 것이 단일화폐이다. 독일은 베를린 장벽 붕괴이전에 단일화폐 도입을 위한 협상시기와 과정을 먼 훗날의 일로 이야기했다. 그러나 분단된 나라를 통일하고 또 주변국들, 특히 유럽통합에 적극적이라는 신뢰감을 다시금 심어주기위해 결국 마르크화를 포기하게 된다.
     서독은 마르크화 포기의 대가로 정치통합도 앞당기자는 제안을 했다. 따라서 1990년 12월부터 약 1년간 단일화폐 도입과 정치통합을 진전시기키 위한 유럽공동체 회원국 대표간의 정부간회의 (Intergovernmental Conference: IGC) 가 열렸다. 이 회의의 결과 단계별로 단일화폐를 도입한다는 합의가 이루어졌고 유럽정치협력으로 시작된 정치통합도 더 진전을 이루자고 합의되었다. 1992년 2월 네덜란드의 마스트리히트에서 체결되었기 때문에 일명 ‘마스트리히트조약’이라고 불리나 정식명칭은 ‘유럽연합조약’이다.

                  단계별 단일화폐 도입
     서독은 마르크화의 패권을 포기하는 대신 창설될 유럽중앙은행 (European Central Bank: ECB)이 서독의 모델을 따를 것을 협상의 주요목표로 채택, 관철시켰다. 서독의 중앙은행 분데스방크는 법적으로 통화가치의 안정을 목표로 규정했고 이를 위해 그 어느 누구나 기관의 지시도 받지 않는다고 명시했다. 그러나 프랑스나 영국 등 여러나라에서 중앙은행의 역할은 독일과 상이했다. 즉 상당수의 나라에서 중앙은행은 정부정책을 보좌하며 정부의 지시에 따라 통화량을 늘리거나 줄이는 역할을 했다. 단일화폐에 가입하기위해서는 법을 고쳐 중앙은행의 독립성을 보장해야 한다. 또 단일화폐를 도입한 나라의 경제조건이 너무 상이하면 다른 나라에 부담을 주기 때문에 가입조건도 명시했다. 정부예산적자가 국내총생산 (GDP)의 3%를 넘어서는 안되고 공공부문의 부채가 국내총생산의 60%를 초과해서도 안된다. 또 장기이자율과 인플레이션율도 가장 낮은 3개나라와 비교, 일정 %를 초과해서는 안된다. 이런 규칙 모두 독일이 제시했고 강력하게 밀어부쳐 마스트리히트조약에 명시되었다. 이런 가입조건은 단지 가입하면 파기해도 되는 것이 아니라 단일화폐를 채택하고 있는 한 계속 지켜야 한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현재 독일은 이 규칙을 지키지 못하고 있다. 엄청난 통일비용의 여파로 예산적자가 3%를 넘었다.
     단일화폐는 3단계에 거쳐 채택이 된다. 우선 1단계는 각 국이 자본이동을 자유화해야 한다. 지난호에서 설명했듯이 단일시장을 이루기위한 단일유럽의정서 (SEA)에서도 자본이동의 자유화 일정이 합의되었다. 각 회원국은 대부분 1990년 7월1일까지 이를 지켰다. 이어 2단계에서는 각 국이 경제정책과 통화정책을 긴밀히 조정해야 한다. 마스트리히트조약 체결을 위한 협상과정에서 쟁점은 2단계에서 이미 유럽중앙은행을 설립해야 하는가 하는 점이었다. 프랑스는 이를 주장했으나 독일은 3단계 마지막 과정에서 중앙은행 설립을 주장, 관철했다. 3단계에서는 유럽중앙은행이 창설된다. 각 국 중앙은행이 유럽중앙은행의 정책을 이행한다. 또 각 국 중앙은행장이 유럽중앙은행에 이사로 참가, 정책을 결정한다. 독일의 프랑크푸르트에 소재한 유럽중앙은행은 통화정책을 전담한다. 즉 단일화폐인 유로가입국 모두에게 적용되는 이자율을 정하고 통화량도 조절한다.
     위에서 설명한 바와 같이 단일화폐는 주로 정치적 이유에서 도입이 됐다. 즉 독일문제가 중요한 이유였다. 이 때문에 미국의 저명한 경제학자이자 노벨경제상을 수상한 펠드스타인은 단일화폐 도입이 경제상황을 무시한 결정이라고 비판했다. 유럽공동체 회원국간의 경제정책과 상황이 아주 다르다. 또 미국과 달리 유럽의 노동시장은 유연하지 못하다. 높은 복지수준을 누리고 있고 해고도 그리 자유롭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 단일화폐에 가입한 나라는 실업률이 높아도 이자율을 조정하지 못한다. 유럽중앙은행에서 결정한 이자율을 따라야 하기 때문이다. 또 하나의 문제점은 통화정책과 재정정책이 유럽중앙은행과 각 회원국간에 분리돼 있다는 점이다. 두 정책은 동전의 양면과 같이 밀접한 연관이 있다. 그러나 유럽중앙은행은 통화정책만 전담한다. 세금을 걷고 세율을 조정하는 것은 각 국간 협력만 강화할 뿐이지 아직까지 각 국의 권한이다.
     어쨌든 유로는 1999년 1월1일 국제통화시장에 데뷔했다. 이어 영국과 덴마크, 스웨덴을 제외한 나머지 12개국은 3년간 유로화 도입준비를 했다. 정부기관과 민간이 모두 계산기도 바꾸고 은행기계도 바꾸는 등 유로 도입에 최소한 몇천억원에서 몆조원이 들었다. 이어 2002년 1월1일부터 실물 유로화가 12개 나라에서 통용되었다. 독일과 프랑스, 이태리, 베네룩스 3국, 그리스, 포르투갈, 스페인, 오스트리아, 핀란드, 아일랜드를 가면 어디서나 유로가 통용된다. 환전할 필요가 없다. 이 나라의 기업들도 환차손 걱정할 필요가 없다.
     이처럼 1992년 마스트리히트조약에서 합의한 단일화폐 유로는 1999년 데뷔한 후 2002년 1월부터 실물화폐가 통용됐다. 합의에서 실물화폐 거래까지 거의 10년의 세월이 걸렸다.
     다음호에서는 단일화폐 도입과 함께 합의된 정치통합에 대해 알아보자.

안병억 (케임브리지대학교 유럽통합전공 박사과정 anpye@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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