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생활을 통해 본 유럽통합 (5)

by eunews posted May 30,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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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생활을 통해 본 유럽통합 (5)
     지난 호에서는 단일화폐 유로가 출범한 과정에 대해 알아보았다. 이번에는 왜 정치통합은 경제통합에 비해 더디게 되었으며 현재 정치통합의 단계는 어느 정도인가를 살펴보고자 한다.

               외교와 국방, 거부권 행사 가능
     지난 2003년 3월 미국과 영국 주도의 이라크 침공이 임박했을 때 영국과 프랑스, 독일 등 유럽연합 (EU) 주요 회원국은 이라크 정책을 두고 크게 분열했다. 미국과의 ‘특별한 관계’를 중시하는 영국은 미국의 이라크 침공을 지지했다. 그러나 프랑스와 독일은 유엔결의없는 이라크 침공을 반대했다. 영국의 입장에 스페인과 새로 유럽연합에 가입한 동구권의 대다수 국가가 지지를 표명하면서 유럽연합 회원국은 미 국방장관 럼스펠드가 말한 ‘신유럽’과 ‘구유럽’으로 분열되었다. 당시 언론은 이런 공공연한 분열사태를 보면서 EU가 표방하는 공동외교안보정책 (Common Foreign and Security Policy: CFSP) 이 쓸모없다고 비판했다. 그러나 이는 공동외교안보정책이 어디까지나 회원국간의 합의가 바탕이 돼야만 가능하다는 점, 즉 개별 회원국의 거부권 행사가 가능하다는 점을 제대로 알지 못하고 내린 진단이다.
     지난 호에 자세하게 설명했듯이 경제통합은 단일시장 형성과 단일화폐 도입으로 상당히 진전이 되었다. 유로에 가입한 회원국이 경제주권의 상징인 자국 화폐를 포기했다. 또 프랑크푸르트에 있는 유럽중앙은행이 유로 가입국의 통화량을 조절하고 이자율도 정한다. 이와 비교, 정치통합은 많이 뒤쳐져있다. 왜 그럴까? 정치통합의 발전과정을 살펴보면서 이 문제를 진단해보자.
     1970년 당시 유럽공동체 6개 회원국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 베네룩스 3국) 은 외교분야협력을 강화하기로 합의했다. 주요 국제문제에 대해 입장을 사전에 조율, 한 목소리로 말하기로 노력한다는 것이다. 이를 위해 각 외무부 정책국장의 모임이 정기화되었고 이를 준비하는 실무자들은 더 자주 모였다. 또 이들간에 비밀텔렉스가 설치되어, 주요 국제문제에 대해 항상 의견을 교환할 수 있는 체제가 갖추어졌다. 외무부장관들도 모임을 정례화했다. 그러나 국방문제는 의제에서 제외됐다. 미국 주도의 북대서양조약기구 (나토)가 이런 문제를 논의하는 포럼이었기 때문이다. 이런 유럽정치협력 (European Political Co-operation: EPC) 은 조약의 틀 밖에서 이루어졌다. 경제통합의 뼈대를 이루는 단일시장과 단일화폐의 경우 회원국이 조약이나 법을 준수하지 않으면 행정부역할을 하는 집행위원회가 시정을 요구한다. 그래도 시정이 되지 않으면 유럽법원 (European Court of Justice)에 제소한다. 그러나 정치협력은 법원의 관할권 밖에서 이루어져왔다. 회원국들이 국가주권의 핵심인 외교나 국방문제를 순순히 포기하지 않으려했기 때문이다.
     1992년 2월에 체결된 유럽연합조약 (일명 마스트리히트조약)에서도 정치통합은 일보 전진하는데 그쳤다. 기존의 유럽정치협력을 공동외교안보정책으로 바꾸었다. 이전의 정치협력과 비교, 약간의 협력을 강화하는데 그쳤다. 즉 회원국은 물론이고 행정부역할을 하는 집행위원회도 주요 정책을 제안할 수 있었다. 또 주요 국제문제에 대해 공동입장 (common position)을 취하고 공동행동 (joint action)을 취하도록 노력한다. 독일 등 일부국가는 정책결정에서 다수결을 도입하자는 안을 냈으나 영국과 프랑스의 강력한 거부로 채택이 되지 못했다. 경제통합을 이루는 여러 조치 등 상당수의 결정은 회원국간에 다수결로 이루어진다. 만약에 외교와 국방문제조차 다수결로 이루어진다면 정치통합은 상당한 발전을 이루었을 것이다. 당시 단일화폐 채택이 가장 큰 핵심의제였기 때문에 독일은 공동외교안보정책에서 많은 진전을 희망했으나 이를 관철하지 못했다. 독일은 마르크화의 패권을 포기하는데 반대하는 국내여론의 무마하기 위해 정치통합에서 더 많은  진전을 희망했다. 만약에 독일이 공동외교안보정책을 강력하게 밀어붙였을 경우, 프랑스나 영국의 반대가 거세었을 것이고 이렇게 되면 단일화폐 합의 여부도 불투명했을 것이다. 실제로 협상과정에서 프랑스는 정치통합과 관련해서는 영국과 비슷한 입장을 취했다. 대신 회원국 국가원수들의 모임인 정상회담에서 특정문제에 대해 다수결 채택을 합의하면 가능하다. 이는 거부권 행사가 가능하다는 말이다. 또 공동외교안보정책을 이행하는 과정에서는 다수결 채택이 가능하다. 즉 큰 틀인 정책을 결정할 때에는 거부권 행사가 가능하고 이를 실천하는 과정에서만 다수결이 허용된다.
     공동외교안보정책에 합의한 이후 몇 차례의 공동입장과 공동행동이 있었다. 남아프리카공화국이 지난 1990년대 초 인종차별정책을 폐지했다. 유럽연합 회원국들은 남아공에 대해 공동행동을 실시했다. 각 회원국이 정책을 조율하고 원조정책을 이행, 큰 성과를 거두었다. 각 국이 효율적으로 분업해서 중복된 분야에 지원을 낭비할 필요가 없었다.
     국방문제는 아직도 훨씬 진전이 더디다. 미국 주도의 나토가 냉전붕괴이후 유럽에 여전히 건재하고 있다. 따라서 각 국의 대미정책이 다르기 때문에 이 문제에 대해 합의를 이루기가 쉽지 않다. 영국은 미국과의 관계를 강화하는 것이 국익이라고 여긴다. 반면에 프랑스는 유일한 초강대국 미국을 자국이 유럽연합에서 지도자 역할을 수행함으로써 견제하려 한다. 또 EU 회원국 모두 냉전붕괴이후 국방비를 줄이고 사회복지와 교육 등에 투자를 늘리려고 한다.
     마스트리히트 조약에서는 점진적으로 공동국방정책과 공동국방을 위해 노력한다고 규정했다. 서유럽동맹 (Western European Union: WEU)이 유럽연합의 국방정책을 수행할 수 있다고 규정했다. 이어 1998년 프랑스와 영국은 생말로 (St Malo) 합의를 통해 전세계 위기지역에 신속배치할 수 있는 6만명의 유럽연합군을 결성하기로 합의했다. 문제는 군사를 파견하는데 필요한 전략수송기와 정보가 없기 때문에 아직도 이 분야는 미국에 의존해야만 한다. 유럽연합군은 미국이 개입을 주저할 때 미국과의 합의를 통해 파견할 수 있다. 전 유고연방의 하나인 마케도니아에 유럽연합 각 국이 군을 파견, 치안유지활동을 하고 있다. 보통 각 회원국이 순번제로 돌아가며 지휘권을 행사하며 파견 군끼리 협조하는 정도이다.

                    내무.법무분야 협력
     첫 회에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경험하는 경제통합, 정치통합, 사회.문화통합의 예를 들어보았다. 각 분야의 통합이 별도로 전개되는 것이 아니라 서로 긴밀한 관계를 맺어 진행되고 있음을 강조했다. 단일시장을 이루다보니 회원국 국민들의 왕래가 빈번해진다. 또 국경통제가 사라져가면서 일반 국민뿐만 아니라 범죄인들도 마음대로 왕래가 가능해졌다. 예컨대 독일에서 범죄를 저지르고 이웃나라인 프랑스나 네덜란드 등으로 차를 타고 얼마든지 도주가 가능하다.
     따라서 마스트리히트조약에서 각 회원국은 내무와 법무분야의 협력도 강화하기로 합의했다. 공동외교안보정책과 마찬가지로 거부권 행사가 가능하다. 마찬가지로 유럽법원이 이 문제에 대해 관할권을 행사하지 못한다.
회원국들은 범죄인 정보를 교류하고 비유럽연합 회원국 국민에 대해 공동정책을 취한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EU 대부분의 회원국을 관광할 때 3개월까지 비자가 필요없다. 90년대 중반 각 국이 내무.법무분야 협력규정에 따라 이런 공동정책을 실시해오고 있다.
     공동체포영장은 이 분야 협력의 대표적인 경우이다. 지난 2001년 미국에서 9.11 테러가 일어나기 훨씬 전부터 유럽연합 회원국은 공동체포영장 도입을 논의해왔다. 테러와 조직범죄, 인신매매, 돈세탁 등 주요 범죄에 대해 한 회원국이 발부한 영장이 다른 회원국에서도 그대로 통용이 된다. 각 회원국이 다른 회원국의 사법체계를 그대로 인정, 법무분야에서의 통합을 획기적으로 앞당기는 조치이다. 9.11 테러이후 각 회원국은 이 영장의 도입을 앞당겨, 지난해 말부터 이를 채택했다. 이전에는 범죄인 인도협약을 맺은 회원국끼리만 범죄용의자 인도가 가능했다. 또 범죄인 인도에 내무장관이 개입, 정치적 결정을 내릴 필요없이 사법당국간에 곧바로 협력한다.
     각 나라의 내무와 정보당국은 보수적이다. 자국의 다른 부처에도 정보를 공유하지 않기로 유명하다. 그런데 이런 내무.정보당국이 다른 회원국과 밀접하게 협력, 테러 등에 공동대처한다. 지난 7월에 발생한 런던테러를 수사할 때 영국 경찰.사법당국은 EU회원국에 협조를 요청했다. 용의자 색출과 체포과정에서 많은 도움을 받았다고 이 곳 언론은 보도하고 있다.
     외교와 국방, 내무와 법무는 국가주권의 핵심이다. 이 분야의 통합은 비록 단일시장과 단일화폐를 이룬 경제분야의 통합에는 미치지 못한다 할지라도 위에서 설명했듯이 각 회원국은 이 분야에서도 상당한 협력을 하고 있다.
     다음 호에서는 동구권 확대과정에 대해 알아보자.
안병억 (케임브리지대학교 유럽통합전공 박사과정 anpye@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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