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생활을 통해 본 유럽통합 (11)
지난 호에서는 영국이 유럽공동체에 가입한 1973년 이후 영국과 유럽공동체와의 관계를 분석했다. 1975년에 실시된 유럽공동체 가입잔류를 묻는 국민투표와 영국 예산문제를 알아보았다. 이번에는 보수당의 마가렛 대처 총리와 후임자인 존 메이저 총리의 유럽통합 정책을 상술한다.
<마가렛 대처와 존 메이저 총리 재임시기의 영국과 유럽통합>
1986년 2월: 마가렛 대처, 단일시장을 이루기 위한 단일유럽의정서 (Single European Act) 서명.
1990년 11월: 마가렛 대처 총리 사임.
1990년 12월: 존 메이저 총리 취임.
1992년 2월: 존 메이저, 단일화폐 도입을 주내용으로 하는 유럽통합조약 서명.
1992년 5월: 존 메이저 총선에서 승리 (집권 보수당의 과반수가 88석에서 21석으로 줄어듬).
1995년 6월: 존 메이저, 당수 재신임 요구하며 사임. 당수 경선에서 재당선됨.
1997년 4월: 노동당의 토니 블레어 당수가 총리로 취임.
‘철의 여인’이라고 불리는 마가렛 대처 전 총리는 지난달 80회 생일을 맞았다.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을 비롯, 토니 블레어 총리 등 영국 각계의 지도자들이 그녀의 생일을 축하했다. 1979년부터 1990년 11월까지 마가렛 대처는 11년이 넘게 영국을 호령했다. 노조의 월권행위를 저지하는 법안을 통과시켰고 과도한 복지와 높은 실업률로 고전을 면치 못하던 영국경제를 회생시킨 점은 그녀의 위업이다. 그러나 집권 후반기 그녀의 부정적인 유럽통합 정책은 후임자 존 메이저에게 큰 짐이 되었다. 그리고 1997년 존 메이저가 노동당의 토니 블레어 당수에게 총리 자리를 내준 주요 원인이 되기도 했다.
단일시장과 덫
영국예산문제를 해결한 후 영국은 유럽통합에 적극 관여했다. 영국정부는 유럽공동체의 다른 회원국들과 껄끄러웠던 예산문제를 해결한 후 단일시장을 이뤄 경기침체를 극복하자는 캐치프레이즈를 내걸었다. 독일과 프랑스에서도 이런 정책의 필요성을 인정했다. 영국과 다른 회원국간의 의견차이는 단일시장을 이루기 위한 방법에서 나타났다. 단일법전이 없는 관습법의 나라인 영국은 문제해결에서도 실용주의적이며 사례별 접근법을 중시한다. 반면에 독일을 비롯한 대부분의 유럽대륙의 나라들은 로마법 전통을 따라 체계적인 법제정을 강조한다.
이런 시각에서 영국은 단일시장을 이루기 위해, 기존의 법을 잘 준수하도록 노력하자, 그리고 이를 다짐하는 신사협정을 맺자고 제안했다. 1958년 경제공동체 설립을 규정한 로마조약이 이미 회원국간의 단일시장형성을 목표로 하고 있다. 상품과 서비스, 노동과 자본이 자유롭게 이동하는 것이 단일시장이다. 그러나 1970년대 일어난 두차례의 석유파동, 잇따른 경기침체로 회원국들은 각 종 비관세장벽을 통해 단일시장 형성을 저해했다. 따라서 영국의 관점에서는 기존의 법을 잘 지키기만 하면 단일시장을 이룰 수 있다고 주장한 것이다. 물론 영국 정부는 유럽통합에 반대하는 당시 야당인 노동당의 정책 등도 고려, 비공식적인 신사협정을 제안했다. 그러나 독일과 다른 회원국들은 위에서 설명한 대로 체계적인 법정비를 강조한다. 당연히 회원국 정부 대표가 모여 기존 조약의 개정을 논의하고 새로운 조약을 체결하자고 맞섰다.
결국 독일 등 다른 회원국들이 의견을 관철, 로마조약 개정을 논의했다. 1992년 12월 31일까지 회원국간의 단일시장형성을 주내용으로 하는 단일유럽의정서가 1986년 2월 서명됐다. 또 회원국들이 주요 국제문제에 대해 한목소리로 말하도록 노력하는 유럽정치협력 (European Political Co-operation: EPC)도 강화됐다. 유럽공동체의 고유권한인 경제문제와 공동체의 권한밖에서 회원국 정부간에 논의되던 유럽정치협력을 한 조약으로 묶어 실행한다는 의미에서 단일유럽의정서라고 불린다.
얼핏 단순해보이는 이 문서는 그러나 마가렛 대처에게는 덫이 됐다. 단일시장을 이루기 위해서는 회원국간에 서로 다른 기술표준과 각종 법규를 어느정도 조화시키고 필수기준을 충족했을 경우 상호인정해줘야 한다. 또 회원국이 거부권을 행사하면 이런 조치를 이행할 수 없기 때문에, 단일시장을 이루기위한 안건의 경우 과반수 의결을 도입했다. 과반수 의결은 회원국의 경제주권을 많이 침해할 수 있다. 보통 가중 다수결의 경우, 70%만 찬성하면 안건을 통과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마가렛 대처는 과반수 의결을 평가절하했다. 그리고 영국이 경쟁력이 있는 금융서비스와 해상운송 서비스 분야가 단일시장으로 많은 혜택을 입는다며 이 부분을 집중 강조했다. 그러나 독일 등 다른 회원국들은 경제통합이라는 수단을 사용, 정치통합을 앞당긴다는 시각을 가지고 있었다.
단일화폐와 ‘합법적 쿠데타’
단일유럽의정서가 채택된 후 유럽공동체는 단일시장을 이루기 위한 조치를 단계별로 이행해 나갔다. 국경없는 단일시장 ‘1992’라는 캐치프레이즈가 당시 유럽기업과 유럽인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자크 들로르 집행위원회 위원장은 1987년부터 이미 단일시장은 단일화폐를 필요로 한다는 논리를 전개했다. 상품과 서비스, 노동과 자본이 자유롭게 이동하는 단일시장인데 회원국이 각자의 화폐를 보유하고 있다. 이럴 경우 환차손의 위험이 크고 거래비용도 많이 가중된다. 따라서 단일화폐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물론 영국은 이런 논리를 일축했다. 이미 합의한 단일시장을 이루기위한 여러가지 법개정도 업무가 과중하다. 그리고 국가주권의 핵심인 자국의 화폐를 왜 포기하는가?하는 것이 영국정부의 입장이었다.
그러나 1988년 상반기 독일 정부는 유럽공동체 각료이사회 순회의장국이 되었다. 그리고 회원국 중앙은행 총재와 학자들이 참여한 들로르 위원회에 단일화폐 도입에 관한 연구를 위탁한다는데 합의했다. 1989년 상반기 들로르 위원회는 단계별 단일화폐 도입을 권고하는 들로르 보고서를 상정했고, 대다수의 회원국 정상들은 이를 채택했다. 하지만 마가렛 대처는 이를 강력하게 비난했다. 단일화폐라는 것이 독일 마르크화가 행사하던 통화패권을 다른 회원국이 공동행사하는 것이다. 즉 당시 독일 마르크화는 회원국 결제에서 기축통화 역할을 했고, 독일 중앙은행인 분데스방크가 정하는 이자율이 다른 회원국에 큰 영향을 미쳤다. 따라서 독일이 왜 마르크화를 포기하겠는가?라고 영국 정부는 생각했다. 그러나 이전에 설명한 바와 같이 1989년 11월 베를린 장벽이 붕괴되고 독일 통일이 가시화하면서 이런 논리는 점차 설득력을 잃어갔다. 프랑스와 베네룩스 3국 등은 통일독일이 또 다시 유럽을 지배하지 않을까하고 두려워했고 당시 헬무트 콜 독일 총리는 주변국의 이런 우려를 불식시키위해 단일화폐 도입을 앞당기기로 합의했다.
마가렛 대처 총리는 이런 움직임을 강력 반대했지만 저지할 방도가 없었다. 유일한 방안은 기회가 있는대로 강력해질 독일의 패권을 경계하는 연설을 하며 단일화폐에 반대하는 논조를 더해갔다. 그러나 그녀의 이런 부정적인 유럽통합정책은 자당인 보수당내에서 큰 반발을 샀다. 아무리 유럽통합에 반대해도 단일화폐 논의를 저지하거나 영국이 원하는 방향으로 이끌기위해서는 논의에 적극 참여해야 한다. 하지만 대처의 논리와 정책은 정반대로 나갔기 때문이다. 결국 보수당내 친유럽정책을 견지하던 마이클 헤젤타인 의원 (1985년 말 대처의 정책에 반발, 당시 국방부 장관직에서 사임함)이 보수당 당수직 경선에 도전했다. 1990년 11월 열린 당수 1차경선에서 대처는 과반수를 얻지 못해 2차경선에 나갔다. 그러나 이미 대세는 기울어져 있었다. 많은 보수당 의원들은 대처가 2차 경선에서 과반수를 획득할 가능성이 희박하다며 대처의 2차경선 참가를 만류했다. 결국 ‘철의 여인’대처도 2차경선에서 과반수를 얻지 못해 물러나는 치욕을 겪느니 명예롭게 물러나는 길을 택했다. 물론 친유럽통합적인 마이클 헤젤타인 의원이 보수당 당수가 되지 못하도록 덜 유럽통합적인 존 메이저 당시 재무장관을 당수로 지지했다. 메이저는 헤젤타인 의원을 물리치고 당수가 됐고 이어 총리로 취임했다. 3번이나 총선을 이기고 ‘철의여인’으로 불리던 대처도 결국 보수당 의원들의 ‘합법적인 쿠데타’에 의해 물러났다. 그러나 쿠데타의 원인은 대처 자신의 적대적인 유럽통합정책이었다.
존 메이저와 ‘유럽’
존 메이저는 전임자 대처로부터 유럽통합에 대해 극도로 분열된 당을 물려받았고 재직내내 이 문제로 골머리를 앓았다. 또 전임자 대처의 후광에 가려 힘없는 총리라는 오명에 시달렸다.
어쨌든 존 메이저는 나름대로 지도력을 발휘, 단일화폐에 합의한 유럽연합조약 (일명 마스트리히트 조약)에서 단일화폐 도입에 대해 선택적 탈퇴를 얻어냈다. 이로써 영국은 단일화폐 도입을 자국의 동의에 따라 선택할 수 있게 됐다. 또 유럽연합 차원에서 최저임금을 정하고 노동자 권익을 보호하는 사회정책에서도 빠졌다. 이런 조치가 시장기능을 중시하는 영국경제정책에 맞지않고 기업주에 부담이 된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1992년 상반기 실시된 총선에서 메이저는 예상을 깨고 야당인 노동당을 물리치고 승리했다. 이때부터 물러날때 까지 보수당은 유럽문제로 거의 내분에 직면했다. 유럽통합이 단일화폐라는 아주 발달된 단계까지 이르렀고 집권 보수당의 재집권 가능성이 희박했다는 점, 또 과반수가 21석으로 줄어들어 유럽통합에 반대하는 골수 보수당 의원들의 목소리가 높아졌다는 점 등이 보수당의 내분을 촉진한 이유였다.
결국 1997년 5월 40대의 젊은 기수, 노동당의 토니 블레어 당수가 존 메이저를 물리치고 총리가 됐다.
다음 호에서는 1997년 집권한 토니 블레어 총리의 유럽통합 정책을 알아보자.
안병억 (케임브리지대학교 유럽통합전공 박사과정 anpye@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