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동농업정책 (Common Agricultural Policy: CAP) : ‘자랑스런 업적’? 혹은 ‘산처럼 쌓인 버터’?
지난 호에서는 미국과 유럽연합 (EU)간의 관계를 분석했다. 왜 양자 관계가 중요하고 자주 갈등을 겪고 있는지를 알아보았다. 이번에는 미국과 유럽연합간에 빈번한 갈등을 유발하고 있는 EU의 공동농업정책을 알아보자. 무엇이 문제이고 해결방안은 있는가?
프랑스는 공동농업정책을 ‘유럽통합이 이루어낸 자랑스런 업적’이라고 여기고 있다. 그러나 영국은 ‘호수처럼 쌓여 넘치는 포도주 (‘Wine Lake’), ‘산처럼 쌓인 버터’ (Butter Mountains)라며 과잉생산된 농산물과 그 정책을 조롱하고 있다.
유럽통합의 역사속에서 성립한 공동농업정책과 발전과정, 개혁 그리고 전망의 순서대로 분석한다.
유럽차원에서 농업보호: 프랑스 대 독일
1960년대 중반 유럽공동체 차원에서 공동농업정책이 시작되기 전까지 각 회원국은 개별정책을 실시했다. 농민의 소득을 보장하기 위해 농산물을 비싼 가격에 사주거나 농민에게 직접 지원금을 주기도 했다. 2차대전이후 식량이 부족, 거의 기아상태에 있었던 당시 상황, 농민의 수는 적지만 잘 조직화된 로비와 이에 따르는 무시못할 농민표, 땅이 가지는 낭만적인 매력 등 여러가지 이유 때문이었다. 따라서 산업화의 진전으로 전체 산업에서 농업과 농민이 차지하는 비중은 줄어들었지만 농민보호정책은 계속 실시됐다.
1958년 유럽경제공동체 (EEC: European Economic Community) 를 설립하는 로마조약에서 공동농업정책의 목표가 합의되었다. 농업생산량 증가와 농민에게 적정 소득의 보장, 농업시장의 안정과 소비자에게 합당한 가격보장이 그것이었다. 이후 수년간의 협상을 통해 1965년 우선 곡류에 대한 공동정책이 합의되었다. 이어 우유와 치즈 등 농민이 생산하는 거의 모든 분야의 농산품이 포함되기에 이르렀다.
흔히 공동농업정책은 프랑스와 독일의 대협상으로 설명된다. 즉 독일은 경제공동체 출범으로 당시 6개 회원국을 포함하는 단일시장을 얻어 공산품을 수출했다. 이런 거대시장은 독일 경제성장을 이룬 원동력의 하나였다. 반면에 프랑스는 공산품 시장을 독일에게 양보하는 대신, 자국이 많이 생산하며 경쟁력이 있는 농산물 시장을 얻었다. 물론 당시 큰 농업수출국이던 네덜란드도 농산물의 공동정책을 지지했다.
공동정책이란 각 회원국이 개별정책을 포기하고 유럽공동체/연합 차원에서 정책을 결정하고 함께 실행에 옮긴다는 의미이다. 매년 봄에 행정부 역할을 하는 집행위원회 (The Commission of the European Community; 1993년 7월부터 European Union) 가 그 해 각 농산물 가격을 제안한다. 이어 각 회원국의 농수산부장관이나 차관, 혹은 고위 관계자가 모여 제안된 농산물 가격에 대해 협상을 벌인다. 프랑스나 스페인같이 포도주를 많이 생산하는 회원국은 포도주 가격인상을 요구하고, 네덜란드나 덴마크같은 낙농국은 우유나 치즈, 버터의 가격인상을 요구한다. 질긴 협상을 통해 각 농산물의 가격이 정해진다. 즉 각 회원국이 동일한 가격으로 농산물을 판매한다. 물론 2002년 1월 단일화폐, 유로가 12개 회원국에서 통용되기 전까지 단일 농산물 가격은 회계단위 에쿠 (ECU: European Currency Unit)로 계산되었다. 독일 마르크화처럼 화폐가치가 안정되고 평가절상된 나라는 에쿠로 된 가격을 자국화폐로 환산, 농산물 가격을 정했다. 이러다보니 단일가격에도 불구하고 각 나라마다 농산물 가격차이가 났다.
그리고 농민이 생산하는 농산물은 거의 가격을 보장해줬다. 지난해와 비교, 혹은 물가상승률과 비교, 농산물 가격이 하락하면 공동체가 개입, 가격을 보전해준다. 이 때문에 농민들은 농산물 하락에 따른 소득손실을 걱정할 필요가 없다. 따라서 농산물을많이 생산하는 부농일수록 더 많은 지원을 받게 되었고 소농일수록 소규모의 지원을 받을 수밖에 없게 되었다. 공동농업정책의 문제점으로 지적된 소득과 반비례하는 역진정책이다.
이처럼 과잉생산된 농산물이 넘쳐나면서 유럽공동체 예산의 대다수도 농업지원에 소비됐다. 즉 1980년대 중반까지 유럽공동체 예산의 2/3가 전체 인구의 5%도 되지 않는 농민을 위해 사용됐다. 또‘호수처럼 넘치는 포도주’나 ‘산처럼 쌓인 버터’를 저장하고 처분하는 일도 만만치 않았다. 과잉생산된 농산물의 수출을 장려하기 위해 수출보조금을 지불했다. 그러나 대부분 유럽공동체 농산물 가격이 제3세계에서 생산된 농산물보다 가격이 비쌌다 (위에서 설명했듯이 공동체가 농산물 가격하락을 막기위해 가격을 보전해주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수출하는 농민이 가격차이에 따른 손해를 보지 않기 위해 수출보조금을 지불했다. 즉 비싼 공동체 농산물을 싼 가격에 외국으로 수출해야 하니까 그 차액을 농민에게 주었다. 또 유럽연합 회원국에 수입되는 외국 농산물에 대해서는 고율의 수입관세를 메긴다. 수입을 저지하기 위해서이다. 그러나 이런 수출보조금과 수입관세는 미국 등 다른 농산물 수출국과 첨예한 갈등을 유발했다. 관세 및 무역에 관한 일반협정, 가트 (GATT)와 1995년 후신으로 출범한 세계무역기구 (WTO) 협상에서 이 문제는 주요 쟁점사항이 되었다.
공동농업정책의 개혁
위에서 설명한 바와 같이 무역협상에 직면, 미국 등의 압력으로 유럽공동체는 공동농업정책을 개혁해야만 했다. 또 예산의 2/3를 소수의 농민을 위해 소비하다보니 연구개발 등 다른 정책에 사용할 돈이 부족, 일부 회원국에서도 공동농업정책을 개혁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계속 제기됐다.
지금까지 개혁의 방향은 다음과 같다. 우선 유럽공동체가 보장해주는 보장가격의 인상폭을 줄이고 보장량도 줄이는 것이다. 각 회원국은 1985년부터 우유에 대해 보장량 삭감에 합의했다. 즉 보장량 이상 생산된 우유는 가격을 보장해주지 않고 벌금을 물게 했다. 과잉생산된 곡류도 이와 비슷하게 생산량 축소를 권장했다. 생산량에 따른 자동적인 지원이 아닌 선별적인 지원쪽으로 정책방향이 수정되었다.
또 하나는 농민에게 직접 소득보전을 해주는 것이다. 즉 엄청난 화학비료를 사용, 농산품을 많이 생산, 토지가 못쓰게 된 경우가 많았다. 따라서 몇년간 농사를 짓지 않도록 권장하고 이 기간동안의 소득을 보장해주었다. 또 환경친화적인 농업을 장려하기 위해 농촌지역의 보전 등에도 지원을 장려했다.
이에따라 1990년대 중반부터 공동농업정책이 유럽공동체 예산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50%이하로 떨어지게 됐다. 대신 스페인이나 포르투갈, 그리스 등 가난한 회원국에게 지원하는 구조기금의 비중이 15%에서 30%정도로 증가했다. 전체 예산 가운데 1-2%에 불과하던 연구개발 지원비중도 소폭 늘어났다. 그러나 지난 2004년 5월1일 중.동부 유럽 10개국 (폴란드, 체코, 헝가리, 슬로바키아, 슬로베니아, 발트 3국-에스토니아, 라트비아, 리투아니아, 키프로스, 몰타)이 유럽연합에 가입하면서 농업정책은 일부 어려움에 직면했다. 폴란드의 전체인구는 약 3천8백60만명 정도. 경제활동인구의 16%정도가 농업에 종사한다. 따라서 유럽연합 예산으로 폴란드 농민에게 기존 회원국 농민과 같은 액수의 지원을 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 때문에 중.동부 유럽 10개국은 가입협상에서 농민에 대한 단계적 지원을 수용해야만 했다. 그러나 신규 회원국 농민들은 되도록이면 빨리 유럽연합의 예산으로부터 기존 회원국 농민과 비슷한 지원을 받고 싶어한다.
도하개발어젠더: 미국과의 갈등
오는 13일부터 18일까지 홍콩에서 세계무역기구 (WTO)각료회의가 열린다. 보통 도하개발아젠다(Doha Development Agenda: DDA)라고 불린다. 도하개발어젠더는 지난 2001년 11월14일 카타르 도하에서 열린 제4차 세계무역기구(WTO) 각료회의에서 새로이 출범시킨 다자간 무역 협상이다. 2002년부터 3년간 뉴라운드 협상을 진행, 2005년 1월1일까지 종료키로 합의된 상태이다. DDA의 협상방식은 모든 분야의 협상결과를 모든 회원국들이 일괄적으로 수락하는 일괄타결 방식(모든 분야에 대한 협상을 동시에 개시하고 진행하여 동시에 종료하는 것)으로 진행된다. 이 도하개발어젠다 가운데 핵심쟁점사항의 하나가 농업수출보조금과 수입관세의 축소이다.
미국이나 오스트레일리아등 농산물 주요 수출국은 유럽연합이 외국산 농산물에 대해 메기는 수입관세가 지나치게 높다며 최소한 54%정도 관세를 삭감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그러나 유럽연합은 최대 47%까지만 수입관세를 인하할 수 있다며 버티고 있다. 이 정도의 삭감조차 프랑스의 강력한 반발을 사고 있다.
유럽통합의 과정에서 공동농업정책은 프랑스와 독일의 대협상으로 성립했다는 설명을 했다. 프랑스는 공동농업정책의 가장 큰 수혜자이다. 프랑스 농촌을 여행해본 사람은 잘 가꾸어지고 살만한 농촌의 모습을 보았을 것이다. 공동농업정책의 지원으로 가능해졌다. 따라서 프랑스는 공동농업정책을 유럽통합이 이루어낸 자랑스런 업적이라고 여기고 있다. 또 미국과는 다른 유럽식 사회모델의 하나라고 생각한다. 이와함께 프랑스나 다른 유럽연합 회원국은 미국도 농산물에 대한 지원을 계속하고 있다며 외국농산물 수입관세의 대폭적인 삭감에 반발하고 있다. 그러나 영국은 자유무역을 지지한다. 또 공동농업정책으로 별로 혜택을 보지 못하기 때문에 이 정책의 개혁을 지지하고 있다. 반면에 독일은 자유무역을 지지하고 공동농업정책의 문제점을 인정하고 있다. 그러나 프랑스와의 돈독한 관계유지를 위해 독일은 이제까지 공동농업정책에서 프랑스의 입장을 마지못해 지지해왔다.
유럽연합의 통상협상은 집행위원회가 맡고 있다. 토니 블레어 총리의 측근이자 북아일랜드부 장관과 통상산업부 장관을 역임한 피터 만델슨이 집행위원회의 대외통상담당 위원이다. 우선 회원국 관계장관이 공동입장에 합의, 통상담당 집행위원에게 협상지침을 준다. 집행위원은 미국 등 관계국과 협상을 계속하면서, 그 결과를 수시로 보고하고 지침을 받는다.
피터 만델슨이 수입농산물 관세를 47%정도 삭감하는 것이 유럽연합의 협상지침이라고 발표했을 때 프랑스는 크게 반발했다. 그 정도까지의 삭감폭에 합의한 적이 없다며 협상지침을 위반했다고 비판했다.
도하개발어젠터는 원래 올 1월 합의를 목표로 했지만 아직까지 합의를 이루지 못했다. 농업문제를 두고 유럽연합과 미국간의 입장차이가 커서 홍콩의 각료회의에서 양측이 합의를 이룰지 매우 불확실하다.
다음 호에서는 공동외교안보정책을 분석한다.
안병억 케임브리지대학교 국제정치학과 박사과정 (anpye@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