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생활을 통해 본 유럽통합 (24)
지역정책 (Regional Policy)과 구조기금
지난 호에서는 공동어업정책을 분석했다. 회원국간에 12해리만 배타적 영역으로 인정된다. 또 유럽연합 차원에서 어족별로 총허용량과 쿼터를 정해 수산자원의 보호를 꾀하고 있음을 알았다.
이번에는 지역정책과 이를 뒷받침하는 구조기금을 분석한다. 지역정책의 발달과정과 현황은 어떠한가? 유럽연합 예산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어느 정도인가? 가난한 나라와 부자나라간의 양극화 극복이 제대로 되고 있는가?
우선 지역정책의 실례를 들어본다.
실례 1) 영국과 독일관계를 중심으로 유럽통합을 연구하는 필자는 2004년 2월 폴란드를 방문할 기회가 있었다. 독일 베를린에서 독일철도 (도이체반)가 운영하는 폴란드의 아우슈비츠 인근도시 크라카우까지 가는 기차를 이용했다. 베를린을 출발한지 1시간반정도 지나 폴란드로 들어섰다. 갑자기 최첨단 문명에서 40-50년 정도 낙후된 지역으로 접어들었음을 실감했다. 차창밖으로 보이는 폴란드의 소도시는 경제개발이 시작되기 전 1960년대의 우리 농촌과 흡사했다. 여기저기 낡은 건물이 방치돼 있고 집도 허름했다. 국경지대를 지나 폴란드 내륙의 다른 도시를 지나면서 본 광경도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독일과 비교, 국가간 격차를 금방 알아차릴 수 있었다. 군데군데 재개발공사현장이 있었는데 유럽연합의 지원으로 공사를 하고 있다는 안내문을 볼 수 있었다. 유럽연합 예산은 바로 이처럼 낙후된 지역을 지원, 지역간의 격차를 극복하려고 하고 있다.
실례 2) 1997년 개봉된 영국영화 풀몬티 (Full Monty)를 본 독자들이 있으리라 짐작된다. 영화배경은 과거 공업도시로 번창했지만 제조업들이 문을 닫으면서 쇠락하고 있는 영국 중부의 쉐필드시였다. 직장을 잃은 아버지는 구직전선에 나서지만 마땅한 일자리가 없다. 같은 처지에 있는 가장들이 모여 남자 누두쇼를 선보인다. 구직자의 설움과 일자리를 잃으면서 발생하는 부부간의 갈등을 코믹하게 잘 그렸다. 유럽연합의 정책은 사양산업으로 쇠퇴하는 도시, 이런 곳에서 일자리를 잃고 어려움을 겪는 가장들의 재직업훈련 등을 지원한다.
실례 3) 영국의 웬만한 도시에 우먼스리소스센터 (Woman’s Resource Centre)가 있다. 주로 영주권이 있는 여성들에게 취업에 필요한 컴퓨터, 영어, 외국어 등을 무료로 가르쳐주고 있다. 필자가 있는 케임브리지 센터는 유럽연합의 사회기금의 지원을 받고 있다고 팜플렛에 명기하고 있다 (사회기금은 구조기금에 포함됨).
유럽통합사에서 제기된 지역간 격차와 이를 해소하기 위한 지역정책을 보자.
유럽공동체 확대에 따른 남북문제와 지역정책
1973년 영국과 아일랜드, 덴마크가 당시 유럽공동체의 신규 회원국이 되었다. 영국과 아일랜드의 경우 기존 6개 회원국 (독일, 프랑스, 이탈리아, 베네룩스3국)과 비교, 가난했다. 특히 영국의 경우 공동체예산의 70%정도가 농민지원에 사용되는데 혜택을 거의 받지 못하기 때문에 이에 대한 반대급부로 공동체 예산으로 낙후지역을 지원해주는 지역정책을 강력하게 요구했다. 당시 영국의 많은 탄광이 폐광되고 있었고 제조업도 구조조정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유럽공동체 예산은 수입측면에서 보통 자체예산 (own resources)이라고 불린다. 대부분의 국제기구 예산이 회원국의 분담금만으로 이루어진 것과 다르게 유럽공동체는 공동정책의 결과 발생하는 이익을 예산으로 사용한다. 즉 공동농업정책과 공동무역정책의 채택으로 비회원국에서 수입되는 농산물과 공산품에 관세를 메긴다. 이 관세가 공동체 예산의 수입으로 충당된다. 또 각 회원국이 공동의 기준으로 합의한 부가가치세 1%도 공동체 예산이 된다. 영국은 영연방으로부터 수입하는 농산물과 공산품이 많았고 최초의 산업혁명을 이룩한 나라여서 농민의 수가 아주 적었다. 따라서 공동체 예산의 납부규칙에 따라 많은 돈을 지불했으나 거의 혜택을 받지 못했다.
영국의 지역정책 실시 요구는 기존 회원국에게 별로 달갑지 않았다. 기존 회원국이 추가로 재원을 부담해야 했기 때문이다. 1973년에 발생한 오일쇼크로 서독과 프랑스 등 기존 회원국의 경기침체가 계속됐다. 그러나 가난한 나라를 도와준다는 의미에서 1975년 유럽지역개발기금 (European Regional Development Fund)이 설립됐다. 공동체의 1인당 평균 국민총생산을 기준으로 가난한 나라를 지원해주었다. 1975년 6월 영국에서는 유럽공동체 잔류를 묻는 국민투표가 실시됐는데 당시 영국의 잔류를 지지하기 위해 다른 회원국들이 돈을 추렴한 셈이다.
1981년 그리스, 1986년 스페인과 포르투갈이 유럽공동체의 신규 회원이 되었다. 영국 등 3개국이 가입할 때와 비교, 이들 3개 나라는 더 가난했다. 공동체 차원에서 남북문제를 좀 더 효율적으로 대처할 필요가 대두했다. 이런 정책적 필요성이 당시의 공동체 발전과정과 잘 맞물려 지역정책이 보강됐다.
1986년 2월 유럽공동체 12개 회원국은 1992년 12월31일까지 단일시장 형성을 목표로 하는 단일유럽의정서 (Single European Act: SEA)를 채택했다. 상품과 서비스, 노동과 자본이 회원국간에 자유롭게 이동하는 내부시장을 형성하기 위해 많은 비관세장벽을 제거해야 했다. 회원국간 상이한 기술표준과 제도, 규범 등을 조화시키거나 상호인정해주어야 했다. 또 다국적기업들도 좀 더 유리한 경제여건을 찾아 공장을 옮기는 등 단일시장은 회원국간의 치열한 경쟁을 의미했다. 당연히 그리스, 스페인, 포르투갈은 단일시장 형성을 위해 회원국간에 전개되는 치열한 압력에 치일까 두려워했다. 당시 비전을 지니고 있던 유럽공동체 집행위원회 자크 들로르 위원장은 이런 점을 적극 활용, 지역정책을 대폭 손질하고 이에 드는 예산을 두배로 늘리자는 제안을 했다.
앞서 언급한 지역개발기금의 경우 가난한 나라에 쿼터를 정해 지원해주면 그만일뿐 공동체 차원의 사후점검이나 개입은 거의 미미했다. 들로르 위원장은 공동체 차원의 큰 원칙에 따른 지역정책을 입안했다. 유럽공동체의 돈이 회원국의 지역정책을 대체하는 것이 아니라 보충해주고, 대규모 사업의 경우 부족한 돈을 우선 지원해준다는 원칙을 마련했다. 또 지원해줄 대상지역도 5개 지역으로 세분했다. 대상지역 1은 회원국 국내총생산 평균의 75% 이하인 지역, 대상지역 2는 구조조정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지역 등이다. 첫머리에 예로 든 쉐필드시같은 곳이 이런 지원을 받을 수 있다.
그의 제안은 1년여에 걸친 회원국간의 논쟁끝에 1988년 2월 채택되었다. 지역정책을 수행하는 유럽공동체 예산상 구조기금의 비중은 1988년 전체 예산의 15%에 불과했다. 그러나 1993년 초 이 비중은 30% 정도로 늘어났다. 예산의 70%정도를 차지하고 있던 공동농업정책의 지원을 대폭 줄여 이런 예산 지출의 우선순위 변화를 가져올 수 있었다. 구조기금은 지역개발기금, 여성과 청소년의 직업훈련을 지원해주는 사회기금, 농촌기반시설을 지원해주는 기금을 모두 포함하고 있다.
부자 회원국들은 가난한 회원국을 더 많이 지원해주자는 원칙에는 찬성했다. 그러나 공동체 예산을 대폭 늘리고 이를 위해 회원국의 경제력 규모에 따른 분담금을 새로운 예산수입으로 지불해야 했다. 부국의 경우 공동체에 더 많은 돈을 지불해야 하기 때문에 합의에 1년이 넘게 걸렸다. 특히 공동농업정책의 최대 수혜자이던 프랑스는 농민지원이 감소함을 달갑지 않게 여겼다. 그러나 단일시장형성이라는 큰 이득을 위해 합의할 수 밖에 없었다.
동구권 확대에 따른 양극화와 구조기금
폴란드를 비롯한 중.동부 유럽 10개국 (폴란드, 체코, 헝가리, 슬로바키아, 슬로베니아, 발트3국, 키프로스, 몰타)은 지난 2004년5월1일 유럽연합 (EU)의 신규 회원국이 되었다. 1989년 베를린 장벽이 붕괴된 후 시장경제 개혁을 추진해온 동구권 국가의 EU가입으로 유럽은 외견상 하나가 되고 있다. 25개 회원국에 인구 4억5천5백만명, 세계총생산의 20%정도를 생산하는 최대의 단일시장이다.
중.동부 유럽 신규 10개국은 기존 회원국과의 경제적 격차가 매우 컸다. 영국이나 스페인이 유럽공동체에 가입할 때와 비교할 수도 없을 정도로 남북문제는 심각했다. 2005년말을 기준으로 1인당 국내총생산을 비교해보자 (구매력 평가기준). 25개 회원국의 평균을 1백으로 했을 경우 기존 회원국 가운데 룩셈부르크가 224.3으로 제일 부유하다. 제일 가난한 라트비아는 45.4에 불과하다. 폴란드는 47.9 이다.
중.동부 유럽 신규 회원국은 가입에 따른 보너스로 당연히 유럽연합 예산으로부터의 많은 지원을 기대했다. 하지만 제일의 경제대국 독일을 비롯한 다른 회원국들의 경기침체로 부자 회원국들은 신입회원을 위해 선뜻 많은 돈을 지불하려고 하지 않았다. 이 때문에 지난해 12월 브뤼셀에서 열린 유럽연합 정상회담은 예산규모와 지출의 우선순위-공동농업정책, 지역정책, 연구개발정책 등-를 두고 치열한 논란을 벌였다.
결국 유럽정상회담 (European Council)과 각료이사회 순회의장국 영국이 제안한 예산규모보다 약 1백30억유로가 많은 8천623억유로를 2007-2013년 유럽연합 예산으로 채택했다. 예산의 소폭증가로 신규 회원국에 대한 지원도 약간 늘어났다. 이 과정에서 유럽연합 예산의 물주 (paymaster)역할을 해온 독일의 역할이 두드러졌다. 독일은 지금까지 가장 많은 돈을 EU예산으로 납부해왔다. 현재 독일은 5백만명이 넘는 실업자로 경제가 좋지 않다. 그러나 신임 앙겔라 메르켈 총리는 추가 부담액 1백30억 유로가운데 최대 액수인 20억유로를 자국이 부담하겠다고 밝혀, 어려웠던 예산협상을 성공으로 이끌었다. 많은 돈을 받게 된 빈국 폴란드는 메르켈 총리를 ‘천사’라고 극찬했다. 물론 추가 부담 때문에 메르켈 총리는 국내에서 비판을 받았다. 필자가 인터뷰한 유럽연합 집행위원회와 유럽의회 직원은 독일 총리를 비전을 지닌 정치인으로 평가했다. 유럽연합을 단순히 돈 몇 푼이 오가는 시장이 아니라 장기적인 관점에서 이해했다는 점이다. 즉 동구권의 가난한 나라들에게 부국이 지원을 늘려, 연대감을 보여주고 이렇게 함으로써 국제무대에 유럽연합이 단순한 경제적 모임이 아니라는 사실을 각인시켜 주었다는 것이다. 물론 독일은 폴란드, 체코 등과 국경을 맞대고 있다. 따라서 이들 이웃나라가 유럽연합의 지원을 받아 경제발전을 하고 경제.사회가 안전되면 이는 독일에게도 장기적으로 이득이 된다.
유럽연합의 경우 남북문제는 최근 더 큰 이슈로 부상했다. 특히 독일을 비롯한 일부 부자회원국들의 경기가 그리 좋지 않아 부국간의 비용분담이 많은 논란을 제기해왔다. 그러나 독일 등 일부 부국들은 부자로서 가난한 나라에 대한 연대감을 보여주고 있다. 일부 회원국은 독일이 물주역할을 하는 이유를 역사적 부채를 씻기 위해서라고 깎아 내리지만 유럽통합을 이끌어온 독일은 통합을 단순한 경제적 문제가 아닌 정치적 통합이라고 여겨, 기꺼이 추가 부담을 해왔다. 아직까지 유럽연합 예산의 46%가 농민지원에 쓰이고 지역개발 등에 지원되는 구조기금의 비중은 30%에 불과하다. 오는 2008-2009년 유럽연합 예산관련 검토가 예정되어 있어 빈국을 더 도와줄 수 있도록 농민지원 액수를 줄이자는 목소리는 더 높아질 것으로 보인다.
다음 호에서는 단일화폐 유로화를 분석한다.
안병억 케임브리지대학교 국제정치학과 박사과정 (anpye@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