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생활을 통해 본 유럽통합 (37)

by eunews posted May 30,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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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생활을 통해 본 유럽통합 (37)
   독일과 유럽통합 (2)

       지난 호에서는 1950년대말까지 독일의 유럽통합 정책을 분석했다. 2차대전을 일으켜 패망한 독일은 전후 국제사회에서 신뢰할만한 국가로 인정받기 위해 유럽통합에 매우 적극적이었다. 또 초대 총리인 기민당의 콘라트 아데나워는 친서방정책 (Westbindung)을 외교정책의 기조로 삼았다 (북대서양조약기구 (NATO) 가입과 유럽공동체 가입이 핵심임). 야당인 사민당은 초기에 친서방정책을 반대하다가, 1959년 여당의 이런 유럽통합 정책을 수용했다.
       이번에는 아데나워 총리 말기의 유럽정책을 분석한다. 프랑스와의 화해를 상징하는 독불친선조약 (프랑스의 대통령궁인 엘리제에서 체결되어 일명 엘리제 조약이라고도 불림), 이를 둘러싼 갈등을 상술한다.

                   <독일과 유럽통합 주요 연표: 1961-1963까지>

       1961년 5월: 콘라트 아데나워 총리 4대 총선에서 이겨 4번째 내각구성
       1962년 10월26일: 슈피겔 사건 시작됨 (이  사건으로 아데나워는 수세에 몰려 1963년 물러나겠다고 약속함)
        1963년 1월22일: 독불 친선조약 (일명 엘리제 조약) 서명됨.
       1963년 10월 15일: 아데나워 총리 사임함. 루트비히 에르하르트가 총리가 됨.

       아데나워 총리의 유럽통합 정책이 후세에 미친 영향을 실례를 들어 알아보자.

       실례 1) 2003년말 독일의 제2공영방송 (ZDF: Zweites Deutsches Fernsehen)은 역사상 위대한 독일인에 대한 설문조사를 실시했다. 놀랍게도 초대 총리 콘라트 아데나워가 1위를 차지했다. 마틴 루터나 칼 마르크스도 위대한 독일인으로 선정되었다. 영국에 거주하는 독자들은 2002년 BBC방송이 실시한 설문조사에서 윈스톤 처칠이 가장 위대한 영국인으로 선정됐음을 기억할 것이다. 독일에서는 아데나워 총리가 그런 위상을 차지한 셈이다. ZDF 현대사 부장 귀도 크놉은 아데나워의 위대성을 친서방정책 (유럽통합과 나토가입), 건국의 기반을 다진 점을 들었다. 2차대전 패망후 민족국가의 틀조차 갖추지 못하고 ‘제로의 시간’에 처해있던 독일을 다시 재건하는데 큰 역할을 했다는 점을 강조했다.

       실례 2) 2003년 1월22일 독일과 프랑스 양국 정부는 엘리제 조약 40주년 기념식을 성대하게 거행했다. 프랑스의 자크 시라크 대통령이 독일 의회에서, 그리고 게르하르트 슈뢰더 독일 총리가 프랑스 의회에서 각각 연설을 했다. 두 정상은 연설을 통해 두 나라의 관계개선이 유럽의 평화와 발전에 기여한 점을 강조했다. 또 앞으로도 두 나라가 유럽통합에 적극적인 역할을 하자는 점도 잊지 않았다. 40년전 독일에서 많은 논란을 거치며 비준된 독불친선조약이 두 나라에 끼친 영향, 아울러 이를 필생의 업적으로 추진해온 아데나워 총리의 업적을 알 수 있는 대목이었다.
      
1) 4대 총선과 슈피겔 사건
      
       1961년 5월 기민당의 콘라트 아데나워 총재는 4대 총선에서도 야당인 사민당을 물리쳤다. 당시 사민당 후보는 분단 도시의 상징이었던 베를린시 시장 빌리 브란트였다. 48세의 빌리 브란트는 세대 교체론을 내세웠다. 또 독일의 J.F. Kennedy를 표방하며 미디어 선거를 이끌었다. 그러나 84세의 아데나워 총리는 12년간 치적을 강조하며 총선을 승리로 이끌었다. 또 선거에서 빌리 브란트 후보를 ‘허버트 프람’이라고 하며 인신공격을 일삼았다. 사생아였던 브란트 후보의 어릴적 이름은 허버트 프람이었다. 아데나워는 개인의 신상을 마구 들먹이며 브란트가 나치를 피해 노르웨이로 도망을 갔었다는 등 온갖 비난을 퍼부었다.
       어쨌든 84세 노인이 연거푸 4번 총선에서 승리한 후 얼마 지나지 않아 레임덕 (권력누수)이 시작되었다. 아데나워 총리의 사임을 재촉한 슈피겔 사건은 1962년 10월26일 밤 시작되었다.
       수백명의 독일 검.경이 함부르크시에 있는 시사주간지 슈피겔 사무실을 급습했다. 편집국 사무실을 4주간 점검하며 슈피겔 발행인인자 편집인이던 루돌프 아우크슈타인, 그리고 서독군을 비판하는 기사를 쓴 콘라트 알러스 기자 등 8명을 체포하거나 투옥했다. 발행인이던 아우크슈타인은 103일간이나 투옥돼 있었다.
       슈피겔지는 10월10일자에서 서독군의 방위태세가 매우 미흡하다고 보도했다. 북대서양조약기구 (NATO)가 실시한 기동훈련에서 서독군은 제대로 훈련이 되지 않았다는 점, 그리고 나토에서 합의된 재래식 군비증강을 자꾸 미루면서 핵무장을 추진한다고 국방부 장관이자 기사당 총재이던 프란츠 요제프 슈트라우스를 비판했다. 물론 이전에도 이 잡지는 슈트라우스 국방장관이 친인척이 운영하는 업체를 군물자 공급업체로 지정한 점, 독일내 미군 기지입찰 의혹 등을 집중 보도한바 있다. 기회를 노리고 있던 슈트라우스 국방부장관은 이 기사가 국가기밀을 누설했다며 아우크슈타인을 반역혐의로 체포한 것이다.
       당시 아데나워 총리가 이 사건에서 무슨 역할을 했는지는 정확하게 알려지지 않았다. 그러나 총리는 국회에서 슈피겔지 발행인이 반역행위를 저질렀으며 이렇게 해서 돈을 벌었다. 그리고 광고주들에게 광고를 주지 말라는 망언을 하기에 이르렀다. 결국 이 사건으로 슈트라우스 국방장관이 물러나고 아데나워 총리도 수세에 몰려 1963년에 총리에서 물러나기로 자당 의원들에게 약속을 했다. 아우크슈타인과 다른 기자들은 3년후 대법원에서 무죄 판결을 받았다.
       이 사건이 서독 현대사에서 차지하는 의미는 컸다. 시민들은 검.경이 장악하고 있는 슈피겔지 사무실앞에서 언론탄압에 항의하는 시위를 벌였다. 또 국외에서도 서독 정부의 언론탄압을 규탄하는 비난이 잇따랐다. 이 사건으로 민주주의 초년생인 서독이 과연 민주주의를 정착할 수 있는가 하는 의문도 제기되었다. 어쨌든 “서독에서 민주주의는 슈피겔 사건과 함께 시작되었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이 사건은 현대사에서 이정표가 되었다.

       2) 필생의 업적 독불친선조약
       독일 베를린 중심가에 콘라트 아데나워 재단이 있다. 이 건물 앞에 아데나워 총리와 당시 프랑스의 드골 대통령이 악수하는 조각상이 있다. 1963년 엘리제 조약을 체결할 당시의 모습을 형상화한 것이다.
       독불친선조약은 1962년부터 추진되었다. 두 나라가 외교와 국방 등 중요한 외교정책에 대해 정기적으로 의견을 교환한다. 이를 위해 장관과 총리들이 정기적으로 만난다. 또 청소년 교류가 중요함을 강조하며 이를 지속적으로 추진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얼핏 보기에 별로 문제가 될 게 없을 것 같이 보이지만 이 조약은 독일 국내에서 엄청난 반발을 불러왔다.
       야당인 사민당뿐만 아니라 기민당/기사당과 함께 연립정부를 구성하고 있던 자민당도 이 조약이 미국과의 관계, 영국과의 관계에 끼칠 부정적인 영향을 우려했다. 당시 드골 대통령은 미국의 패권 (헤게모니)에서 벗어나 유럽공동체를 이끌려 했다. 미국의 영향권안에 있는 유럽이 아니라 유럽이 주도하는, 즉 프랑스가 지도자로 행사하는 유럽을 원했다. 이를 위해서는 프랑스 혼자서는 역부족이니까 독일이 절대 필요했다. 따라서 당시 J.K. Kennedy 대통령이나 미국의 주요 정치지도자들은 서독이 프랑스의 영향권 안으로 들어가버리는 것이 아닌가 우려했다. 1963년 1월초 프랑스의 드골 대통령이 기자회견에서 영국의 유럽공동체 가입을 거부한 후 독불친선조약이 체결되었기 때문에 미국의 프랑스에 대한 불신은 극에 달했다.
       정부문서는 30년이 지나면 보통 비밀해제가 된다. 필자가 연구중에 분석했던 서독 외무부 문서는 당시 미국과 영국의 반응을 상세하게 적고 있다. 특히 케네디 대통령은 유럽인들이 원해서 미군이 유럽에 주둔하고 있는데 프랑스가 매우 부정적으로 행동하고 있다며 불쾌감을 감추지 않았다. 만약에 서독이 프랑스에 이끌려 다닌다면 나토의 존재의미가 매우 반감되기 때문이다. 당시 서독군은 60만명 정도로 나토군에서 최대의 재래식 군사력을 보유하고 있었다. 이런데 만약에 서독이 프랑스처럼 나토에서 탈퇴하려고 한다면 걷잡을 수 없는 일이 생길 것이기 때문이었다. 수세에 빠진 서독정부는 이 조약을 체결하면 프랑스와 주요 국제문제에 대해 수시로 의견을 교환하기 때문에 오히려 프랑스의 반미정책을 견제할 수 있다는 논리를 폈다.
       서독 의회는 비준과정에서 이 조약의 문제점을 집중적으로 따졌다. 결국 비준의 대가로 이 조약은 많이 희석되었다.  이 조약으로 서독의 나토가입, 미국과 영국과의 관계가 영향을 받는 것은 아니다. 또 영국과 다른 나라들의 유럽공동체 가입도 적극 지지한다는 별도 조항을 삽입한 후에 이 조약은 통과되었다. 드골 대통령은 이처럼 희석된 조약에 진노했다. 원하던 방향과 정반대로 오히려 이 조약체결과정에서 서독이 미국쪽으로 더 끌려간 셈이 되었기 때문이다.
       이처럼 논란을 벌이며 체결된 독불친선조약은 그 후 두 나라 관계의 초석이 되었다. 독일과 프랑스에서 수반이 취임하면 보통 가장 먼저 두 나라를 상호방문한다. 그리고 정기적인 정상회담이외에 수시로 만나거나 전화로 주요 국제문제나 유럽통합정책을 논의하며 사전조정을 한다. 물론 조약이 있었기 때문에 이랬던 것은 아니다. 아무리 조약이 좋아도 지키지 않으면 효과가 없기 때문이다. 최고위층 정치 지도자들이 두 나라의 화해와 협력이 유럽통합에 중요하다는 점을 인식했고 이를 실천했다.
       다음 호에서는 아데나워 이후 1960년대 독일의 유럽통합정책을 분석한다.
  안병억 케임브리지대학교 국제정치학과 박사과정 (anpye@hanmail.net)




(베를린 중심 콘라트 아데나워 재단앞에 있는 조각상. 왼쪽이 드골 대통령, 오른쪽이 아데나워 총리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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