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놔라! 45번 이렇게 살 수는 없다!
제발 나를 죽도록 내버려다오...”
영화 벤허를 기억하는가? 벤허는 친구인 메살라의 모함에 의해 로마 군함에서 노를 젓는 노예가 되었다. 다행히 제독 아리우스의 눈에 띄었고, 벤허는 전투를 앞두고 쇠사슬이 풀린 채 노를 젓도록 배려되었다. 그러던 중 해적 선단과 대전투가 벌어졌는데 아리우스의 배가 해적선에게 받혀 침몰했다. 벤허는 쇠사슬이 풀려 있어서 탈출할 수 있었지만, 배가 침몰하여 물에 빠진 아리우스를 건져 냈다.
망망대해에서 널판 위에 두 사람이 떠 있었다. 아리우스는 의식을 회복하자 전투에 패배한 책임으로 자결하려고 했다. 하지만 벤허가 막았다. 벤허는 아리우스를 기절시키고 자결을 막았다. 다시 의식이 돌아온 아리우스는 “45번, 왜 나를 죽지 못하게 막느냐? 나를 죽게 내버려다오!”했다. 그러다 멀리서 함대가 나타나는 것이 보였다. 해적 선단인지 로마 함대인지 가려내기 어려웠다.
“해적선단이면 그들이 너는 살리고 나는 죽일 것이다. 행운을 빈다.”
그런데 배가 가까이 오자, 로마군을 상징하는 독수리 문양의 깃발이 보였다.
“로마 함대다!”
아리우스와 벤허는 구조되어 배에 올랐다.
“각하, 우리는 사상 유례 없는 대승을 하였습니다!”
“오, 그럴 리가! 정말인가?”
“우리 측은 각하의 배와 몇 척만 침몰되었고 해적선은 완전히 궤멸하였습니다. 이제 지중해는 평정되었습니다. 자유무역이 이루어질 것이고 황제 폐하와 제국에게 엄청난 이익이 안겨질 것입니다.”
그제서야 아리우스는 승리를 받아들일 수 있었다. 그는 로마로 개선하여 황제의 뜨거운 환영을 받았다. 물론 그 자리에는 그를 구해준 쥬다 벤허도 함께 했다. 그 후 벤허는 아리우스의 양아들이 되었다.
널조각 위에서의 아리우스와 함대 위에서의 아리우스는 보는 것이 달랐고 생각이 달랐다. 널조각 위에서의 아리우스는 전쟁의 패배만 보았고 절망만 보았다. 그것은 일부분에 지나지 않는 사실이었다. 함대 위에서 진상을 알았을 때, 아리우스는 대승을 보았고, 황제의 상이 자기를 기다리고 있음을 보았다. 이처럼 똑같은 사실이어도 어디서 보느냐에 따라서 보는 것이 다르다.
많은 사람들이 어떤 일을 만날 때 문제 중 하나는 어떤 한 부분에서만 본다는 것이다. 자기 생각, 자기 주관, 자기의 경험과 방법 안에서 바라보는 세계는 널빤지 위에서 아리우스가 보는 것과 같을 수 있다. 그래서 쉽게 좌절하고 낙망할 것이다. 하지만 자기 생각의 틀을 넘어서 볼 때에는 문제 속에서도 소망을 찾아낼 수 있다. 성경은 우리가 보는 시각과 다른 시각으로 사물과 현상을 보는 법을 가르쳐준다. 내가 보는 것과 다른 눈으로 보는 그것을 믿음의 눈이라고도 부르는데, 믿음의 눈을 가지면 모든 것이 새롭고 복되게 보이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