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의 압제 아래 조국을 잃은 슬픔과 차별대우를 경험하면서 자란 마리 퀴리. 그녀는 장래가 촉망되는 학생이었지만 러시아의 식민지인 폴란드의 당시 체제 아래 도저히 공부를 계속할 수 없었고, 결국 프랑스로 떠난다. 학생기숙사의 빵과 버터와 차만을 먹으며, 그녀는 그렇게 밤을 지새우며 공부한다. 겨울날에는 대학노트에 간간히 수은주 온도를 적어가며 추위와 싸웠고, 얇은 담요 외에 덮을 것이 없어 두꺼운 책들을 올려놓고 잠을 청했다. 그녀의 가난은 촉망받는 화학자였던 피에르 퀴리와 결혼한 후에도 변한 것이 별로 없었다. 두 부부는 세간도 별로 없는 좁은 아파트에서 살았는데, 당시 이들의 연구 환경은 지금의 과학자들은 상상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열악했다.
“우리는 비가 새는 헛간에서 밤낮없이 연구했다. 좋지 않은 환경에서 너무도 어려웠다. 일할 장소도 마땅치 않았고 돈도 없었고 일손도 딸렸다. 일 때문에 기진맥진했지만 그러나 우리는 이리저리 걸으며 일과 우리의 현재와 미래를 이야기했다. 추울 때에는 난로 옆에서 뜨거운 차를 마시면 기운이 나곤 했다. 우리는 꿈꿔온 대로 일에 완전히 몰두했다.”
이같이 두 부부는 이 악조건을 끝없는 열정과 끈기로 꿋꿋하게 이겨냈다. 자연의 법칙을 발견하는 데에 자신을 쏟아 부을 가치가 충분하다고 여겼으며 그 목표를 향해 사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행복했다. 그래서 많은 부족한 여건들이 그들에겐 문제가 아니었다.
“인생은 누구에게도 편안한 것은 아니지만, 그러한 것은 아무렇지도 않다. 인내와 특히 자신을 갖는 것이 필요하다. 우리는 무엇이든 재능을 가지고 있다는 것, 그리고 무엇인가에 어떠한 희생을 치를지라도 도달하지 않아서는 안 될 목표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그들은 방사능 물질을 주머니에 넣고 다니거나, 침대 머리맡에 두며 연구를 계속했다. 결국 그녀는 남편 피에르와 함께 우라늄광에서 새로운 원소를 분리해 내었고, 그 원소들을 폴로늄과 라듐이라고 이름 붙인다. 그리고 그것으로 1903년에 퀴리 부부는 노벨 물리학상을 수상하면서 세계적으로 유명해졌다. 그러나 이들은 연구에 방해가 된다며 수상식에도 참가하지 않았다.
몇 년 뒤 남편인 피에르가 갑작스런 사고로 죽음을 맞지만 마리 퀴리는 연구를 계속 이어나간다. 그리고 라듐에 대한 공식 표준을 정하는 등의 업적으로 다시 노벨 화학상을 수상한다. 그러나 그녀는 예전과 달라진 것이 없었다. 가난과 열악한 여건 속에서도 유혹과 타협하지 않는 학문을 향한 순수한 열정, 그것으로 남은 생 전부를 방사성 연구에 바친다. 그래서 여성으로는 처음으로 소르본느 대학의 물리학 박사요, 소르본느 대학 최초의 여교수, 노벨상을 두 번이나 수상한 최초의 여성 과학자, 핵물리학 분야에 새로운 길을 연 사람이 된다.
퀴리 부부의 맏딸 이렌과 그녀의 남편 프레데릭도 퀴리 부부의 정신을 이어 일생을 과학을 위해 몸 바친다. 그리고 이들도 얼마 지나지 않아 학자로서 뛰어난 재능을 발휘하기 시작, 1934년에 인공방사능의 현상을 발견해 노벨 화학상을 수상한다. 노벨상을 수상한 네 명의 퀴리! 그들의 공통분모는 새로운 것을 찾아가는 학문에 대한 열정, 그리고 그로인한 결실과 그 기쁨 그 자체에 만족할 뿐, 그것들을 돈과 욕망으로 바꾸지 않는 ‘순수한 정신’일 것이다. 그것이 그들에게 수여된 노벨상보다 더 가치 있고 귀한 보물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