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 사변은 많은 사람들의 삶을 뒤흔들어 놓고 가난과 헤어짐의 고통을 주었다.
나의 경우도 예외가 아니어서 6.25 직후 초등학교 1학년 때 부산으로 피난 가서 어려운 시절을 보냈다. 학교 교실은 판자로 벽을 댄 가교사(假校舍)였고 피난민들은 한겨울에도 온 가족이 온기(溫氣)하나 없는 단칸방에서 이불을 뒤집어 쓰고 오들오들 떨면서 지냈다.
학교에서는 학생들의 생활환경을 주기적으로 조사하였는데 대부분 부모의 직업이 없었다. 대중목욕탕에 가서 목욕하는 것은 추석이나 설날 같은 명절 전날에나 가능한 일이었다.
중학교 1학년을 마치고 서울로 전학하여 2층 점포가 딸리고 정원이 있는 동네에서 꽤 큰 축에 드는 한옥에서 어려움 없이 지내던 어느 날 목욕탕에서 갑자기 쓰러지신 아버지는 정신은 말짱했지만 움직이지도, 말도 못하고 누워계신 채로 하루를 지내고 돌아가셨다.
당시 민사소송 중이었는데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패소(敗訴)하고 바로 집행관들이 들이닥쳐 밥솥과 밥그릇, 숟가락, 젓가락만 들고 길거리에 나앉게 되었다.
급한 대로 어머님과 3형제는 작은 한옥에 사는 큰 누님 집의 방 한 칸을 얻어 들어갔다. 동네 이웃 회사사장이 자기 회사 사환으로 받아주겠다고 제의하였으나 가정교사를 해서 버는 돈과 장학금으로 어렵게 생활하며 공부를 계속할 수 있었다.
고등학교를 거쳐 대학을 졸업할 때까지 스트레스로 인한 위장병으로 고통을 받았다.
대학에 가서 의학이나 건축학을 전공하고 싶었으나 큰누님의 강한 권유로 법학을 택하게 되었다. 스트레스로 인한 정신적 극한 상황 속에서 자살의 충동을 느낀 적도 있었으나 대학 1학년을 마치자 갑자기 영장이 나와 군에 입영하는 바람에 절박한 상황을 벗어날 수 있었다.
소총수로 최전방 철책선에서 근무하다 월남에 가서 13개월을 지내고 귀국하여 제대하였다.
대학에 복학한 후의 생활도 군 입영 전과 달라진 것은 없었으나 심적인 극한상황을 이겨낼 수 있었다.
경제적인 어려움으로 고시공부를 포기하고 대학을 졸업하자마자 한국은행에 들어갔다. 길어야 4년을 넘기지 않겠다던 당초의 생각과는 달리 25년여를 봉직하였다.
한국은행 파리사무소 부소장을 끝으로 IMF 환란 직후 귀국하여 새로 발족한 금융감독원에서 국장으로 근무하다 2002. 5.29 스스로 사직하였다.
어릴 때부터 ‘나’라는 존재가 무엇인지 알고 싶어 다락방에 올라가 몇 시간을 가부좌하고 앉아 있기도 하고 이런 저런 책도 보았다. 천주교 집안이어서 신앙생활도 열심히 하였다.
1980년대 후반부터는 단전호흡을 시작하여 금융감독원을 떠날 때까지 열심히 수련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