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은 지난날에 머무른다. 어린 시절 고향을 떠나 50년이 지나도 50년 전 그 시절의 고향을 잊지 못하고, 고국을 떠나 지구의 반대편 이국에서 몇 십 년을 살아도 떠날 당시의 고국을 그리워한다. 산골에서 다닌 초등학교 시절도 잊지 못하고 들판으로 시냇가로 뛰놀던 그 시절을 꿈꾼다.
사람은 살면서 만나고 맺은 인연에 머문다. 는 할아버지가 된 지금도 고향을 소재로 한 TV드라마를 볼 때마다 철부지 코흘리개 어린 시절로 되돌아가 고향친구가 그립고 무릎 배게 하고 옛날 이야기 들려주시던 할머니가 돌아가신 지 30년이 지났지만 길가다 노인을 보면 할머니 생각에 발걸음을 멈춘다. 인생의 등불이 되어주신 중학교 담임선생님도 그립고 때로는 엄하시고 때로는 자애로우셨던 부모님 생각에 이리 뒤척 저리 뒤척 잠 못 이루기도 한다. 눈이 내리는 날이면 말없이 떠난 그 사람이 생각나 날밤을 꼬박 새기도 하고 지금은 고인(故人)이 된 고등학교 시절 단짝 친구 생각에 눈시울을 적신다.
사람은 살면서 겪은 온갖 사연에 머문다. 지금 어려운 일에 한숨짓다가도 행복했던 사연이 떠올라 살며시 미소 짓기도 하고 한 때의 어려움을 넘어서 순탄한 삶을 살다가도 세파에 시달리는 이웃을 보면 내가 겪고 넘어선 그 시절의 어려웠던 사연 속에 빠져들기도 한다. 어찌할 수 없는 상황이었지만 지금 그 일을 생각하면 새삼 후회스럽기도 하고 선택의 갈림길에서 방황하다가 선택한 일이 잘 풀린 사연 생각하면 다행스럽고 흐뭇하다.
사람은 온갖 가진 욕심집착에 머문다. 재물에 욕심 가져 재물 모으려고 애쓰고, 모은 재물 지키고 지킨 재물 불리려고 잠 안자고 설친다. 지위와 명예에 집착 가진 사람은 출세를 위해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 사랑에 목말라 하는 사람은 또 그것을 위해 몸을 던진다. 자식에 매인 사람은 자식 위해 먹고 사는 것도 희생하고 제 자식 귀한 줄만 알고 남의 자식 귀한 줄을 모른다.
사람은 가진 지식, 이념, 자기생각에 머문다. 천동설(天動說)을 가지면 천동설의 오류(誤謬)를 지적하고 지동설(地動說)이 맞다고 아무리 설명해 주어도 받아들이지 않는다. 콜라 병을 신이라고 믿고 있는 부쉬맨에게 하느님, 부처님을 이야기 해 주어도 믿지 않는다. 공산주의 이념에 심취한 사람은 자본주의의 좋은 점을 이야기 해 주어도 들으려 하지 않는다. 자기 생각에 빠져 있는 사람은 남의 말에 귀 기울이지 않는다. 어린 시절 칭찬 한 마디 들으면 그 말대로 살려고 온갖 노력을 하고 소설 속 주인공의 삶에 깊이 감명받은 사람은 그 삶을 되새기며 평생을 그렇게 산다. 장래의 꿈과 희망에 머물러 한껏 부풀기도 하고 불확실한 장래에 지레 불안해 하고 걱정하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