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토니 곰리, Blind Light

by 유로저널 posted Jun 29,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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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호 글에서 쓴 것처럼 영국의 길거리를 걷는 것 자체만으로도 우리는 많은 문화의 정보를 얻을 수 있다. 또한 지금 어떤 전시나 공연이 성행 중인지 또한 쉽게 알 수 있을 것이다.

요즘은 어떤 전시가 한창일까? 이 글을 보고 바로 가까운 지하철역을 가봐도 좋다. 하얀 안개 속에서 누군가의 손이 벽을 잡고 있는 듯한 포스터를 발견하였다면 지금 인기 있는 미술전시 중 하나를 발견한 것이다. 그 포스터의 이미지는 워터루 역 가까이에 있는 Hayward 갤러리에 전시 중인 영국작가 안토리 곰리의 작품 중 하나이다. 포스터만 본다면 도대체 어떤 작품인지 판단하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 언뜻 보기에는 그냥 사진 작품 같기도 하고, 그렇지 않으면 잘 그린 평면작품인가 하는 생각이 들 수도 있다. 하지만 안토니 곰리라는 작가를 안다면 그런 생각보다 좀 더 많은 추측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의 작품의 주된 소재는 ‘사람’이다. 1980년경부터 자신의 몸을 뜬 후 납으로 제작하기 시작하면서 이 ‘사람’이라는 소재를 가지고 다양한 시각적인 표현이 이루어졌다. 그에게 있어 인체를 통한 작품제작은 자신 내면의 통찰하는 매개역할과도 같다. 납이나 철, 콘크리트와 같은 차갑고 투박한 재료를 사용하기도 하며, 식빵과 같은 일상생활에서 찾기 쉽고 일반인에게 친숙한 재료를 사용하기도 한다. 재료가 어떻든 간에 그의 손길이 닿은 모든 것들은 안토니 곰리라는 작가를 잘 표현할 수 있는 훌륭한 도구로 변신한다. 또 하나 그의 작품의 특징 중 하나는 제작된 작품이 전시 공간의 내부뿐만 아니라 외부의 환경과도 친화적으로 융화된다는 것이다. 그는 작품을 실내전시장과 더불어 실외의 일상공간 속에도 설치함으로써 강철 속에서 굳어버린 사람을 현실공간에 던져 놓고 그것을 하나의 외로운 인간상으로 보여주길 원하는 것 같다.

헤이워드 갤러리(Hayward Gallery)는 테이트 모던과 더불어 또 하나의 큰 현대미술전시장이다. 워터루역과 가깝게 위치하고 있어 갤러리로 향하는 교통편 또한 쉽게 찾을 수 있다. 난 윔블던에서 기차를 타고 워터루역으로 향했다. 단 15분만에 그 여정이 끝나서인지 전시에 대한 기대에 비해 그 여정은 실망스럽기가 그지 없었다. 어쨌든 버스를 타고 몇 십 개의 정거장을 거치고 가는 것보다야 큰 전시를 보는 데 있어 기운을 비축할 수 있었으니 그건 괜찮았다. 영국에 온 지 얼마 안 된 선배와 함께 워터루역에서 만나 갤러리로 향했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며 걷던 중 안토니 곰리의 작품 하나를 길에서 볼 수 있었는데 공사구역을 기점으로 해서 박힌 철망 안쪽에 놓여있었다. 이것은 ‘사람’형태를 뜬 전형적인 곰리의 작품으로 그 길을 지나지 않는 사람들에게 보여지기란 쉽지 않겠지만 이 같은 많은 작품들이 런던 곳곳에 설치되었다는 걸 아는 나로서는 그것에 대한 안타까움은 전혀 없었다. 왜냐면 이 길을 찾기 못하는 사람들은 또 다른 곳에서 내가 보지 못한 ‘사람’을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어쨌든 런던의 수십 개의 빌딩들의 옥상과 인도에 설치된 ‘사람’들에 대한 기대는 잠시 뒤로한 채 다시 전시장으로 향했다.

전시가 시작된 지 보름 정도가 지났지만 여전히 전시를 보려는 많은 사람들 때문에 줄을 서서 기다리지 않을 수 없었다. 칼럼이스트라는 직업덕분에 기다리는 것 없이 쉽게 입장할 수도 있으나, 보고 싶은 전시를 코 앞에 두고 기다릴 때 느낄 수 있는 설레임과 흥분을 위해 비를 맞으며 기다리고 다른 사람들과 함께하기로 했다. 선배와 함께 작가 곰리에 대한 이야기를 하던 중 우연히 하늘을 올려다 보니 글쎄 갤러리를 걸어오면서 만났던 그 ‘사람’이 갤러리 입구근처에 있는 빌딩 위에 서 있는 것이다. 비가 내리는 회색의 하늘과 그것을 바라보면서 서있는 모퉁이의 그 ‘사람’의 모습은 알 수 없는 공허함을 느끼게 하였고, 자신의 집에 손님을 초대한 주인의 자세로 입구로 나와 먼저 인사를 하는 듯하기도 하였다.

1층에 있는 대형 설치작품들을 관람 후 계단을 오르면 ‘아하! 지하철역에서 본 그 포스터가 이거였구나’ 하는 것을 알 수 있는 작품이 볼 수 있다. 대형 박스형태의 유리관으로 만들어진 이 작품은 그것을 둘러싸며 기다리고 사람들로 작품이 정확히 뭔지 알기도 전에 또 한번 그들의 모습에 놀랄 수 밖에 없었다. 그 사람들 가까이로 다가가 유리관을 바라보고 있으면 하얀 안개로 가득 차 보이는데, 이때 너무 그 몽롱한 느낌에 빠져있으면 불쑥 그 유리 벽을 짚고 나타나는 그 유리관 안쪽의 사람들 때문에 깜짝 놀라 가슴을 쓸어 내려야 할 것이다. 한 줄로 늘어서서 기다리고 있는 그 사람들이 바로 유리관 안을 경험하고 싶은 것이었다.

이 작품은 관람객에게 두 번의 다른 경험을 제공한다. 하나는 유리관 밖에서 바라보면서 그 박스 안에 있는 사람들을 바라보는 것이다. 벽을 짚고 갑자기 나타나 유리관을 따라 걷는 그들의 모습과 수증기 때문에 만들어지는 벽의 손자국을 바라보면서 외부와 격리된 공간에 머무는 그들의 편안함을 부러워할 수도 있고, 혹은 닫히고 밀폐된 작은 박스 속의 그들을 해방시켜 주고 싶은 충동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각자 다른 시각만큼이나 느껴지는 것 또한 다양하겠지만 ‘나도 저 사람들이 경험하는 것을 해보고 싶다’라는 생각은 같을 것이다. 이 작품이 제공하는 또 다른 경험 중 하나가 바로 그 유리관 안으로 들어가보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길을 찾지 못하고 헤매며 눈 뜬 장님처럼 머뭇거리는 것은 빛이 없는 어두운 공간에서이다. 하지만 이 유리관 안으로 들어가면 빛은 있으나 아무것도 볼 수 없게 된다. 뿌연 수증기가 가득하여 짙은 안개 속을 걷는 듯하며, 습하고 차가운 공기가 주는 알 수 없는 편안함으로 마치 현실에서 도피하여 숨어있는 작은 은신처 같다. 바로 옆에 있는 사람들조차 보기 힘드니 여기저기 사람들의 목소리가 들릴 때면, 나는 그들을 느낄 수 있으나 그들은 나를 보지도, 찾지도 못하는 것 같은 묘한 느낌이 든다. 걷다가 부딪히는 유리 벽에 손을 짚고 밖을 바라보면 내가 밖에 있을 때 그런 것처럼 유리 관 속의 나를 사람들이 하염없이 쳐다본다. 유리관을 짚고 있는 내 손바닥에 한 아이가 다가와 그의 손을 겹쳐 놓았다. 지구인과 외계인이 서로의 손끝을 닿아, 각자의 이질적인 세계와 상관없이 그들의 마음을 전달하던 영화 <ET>의 한 장면처럼, 한번도 본 적이 없는 그 아이와 나 또한 편안함과 친근한 느낌이 그 유리관을 통해 전달되는 듯했다.

새로운 경험을 가져다 준 이 유리관 속에서 나와 한층 더 올라가면 ‘사람’이라는 소재로 다양하게 제작된 그의 많은 작품들을 볼 수 있으며, 그것을 통해 작가 안토니 곰리가 얼마나 다양한 시도를 하였는지 또한 간파 할 수 있을 것이다. 작가는 끊임없이 새로운 것을 찾고 만들어가야 한다는 것은 모두가 아는 사실이지만 그것을 행하는 것은 사실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런 면에서 곰리의 이번 전시는 그의 작가다운 바른 모습을 발견할 수 있는 좋은 기회이다. 갤러리 내에 전시된 작품을 모두 본 후, 꼭 옥상으로 나가보자. 옥상에서 보이는 런던의 빌딩숲 속에서 갤러리를 들어 오기 전 우리를 반기던 그 ‘사람’들을 찾는 것이 이 전시의 관람하는 마지막 과제이며, 핵심이다. 건물 옥상에 서 있는 이 ‘사람’들의 모습은 꼭 중천에 떠도는 우리의 외로운 마음이 사람의 모습으로 내려와 아래의 이성세계에서 그 외로움을 숨기며 사는 슬픈 우리들의 삶을 하염없이 바라보는 것 같다.  

전시일시 : 5월 17일 – 8월 19일
전시장소 : Hayward Gallery  
www.southbankcentre.co.uk/gormle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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