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역사의 중심은 서양이다. 우리가 학교를 다니면서 배웠던 세계사를 떠올려보자. 역사적인 사건들이나 변화를 주도했었던 세력은 주로 유럽권의 나라로, 그들에 의해 지금의 세상이 세워진 듯 하다. 그들의 문명의 발전이 빨랐던 만큼 무지하거나 가난한 나라들은 서양인들의 움직임에 의존할 수 밖에 없었던 것 같다. 세계사책의 내용을 상기시켜보면 역사 속의 큰 사건들의 승리나 잘못에 대한 용납은 거의 대부분 힘있는 나라가 차지하고-일본과 우리나라의 관계처럼- 역사는 그들의 정당성을 주장하기도 한다. 역사는 큰 소리를 칠 수 있는 쪽에 손을 들어주는 듯 하다.
우리 나라 또한 찬란한 역사를 자랑하고 선조들의 용맹함과 지혜에 고개를 숙여 존경의 표시를 하지만 세계의 역사 속에서는 아주 작은 나라에 불과했으며, 우리의 움직임이나 변화에 대해 누구도 관심을 보여주진 않은 듯하다. 슬픈 일이다. 하지만 우리나라뿐 만 아니라 많은 나라들이 긴 이야기를 가진 그들의 역사를 세상에 알리지 못하고 있다.
내가 여행한 나라들 중 또 다시 가보고 싶은 나라 중에 으뜸인 곳은 터키이다. 터키를 여행하면서 느꼈던 감동을 난 아직도 기억한다. 터키를 여행하기 몇 년 전 유럽배낭 여행을 했었는데 잘 보존된 건축물이 즐비해 있고, 책에서나 본 아주 유명한 그림을 실제로 봤을 때의 그 흥분된 마음 또한 잊을 수 없다. 하지만 터키는 내게 신선한 감동과 새로운 충격을 주었다. 터키는 예로부터 아시아와 유럽의 교차로 역할을 하였다. 1453년에 오스만 제국이 콘스탄티노폴리스(현재의 이스탄불)을 함락함에 따라 문화가 다양해졌고, 이스탄불의 유명한 성 소피아 성당도 이슬람 사원으로 개축되게 되었다. 그래서 터키에는 유럽의 나라처럼 한 맥락을 가지고 문화, 예술의 형태가 흐르지 않는다. 겉과 속이 다르듯 터키를 여행하면서 볼 수 있는 대부분의 건축물이나 문화유산들은 다양함과 독특함이 숨겨져 있다. 이것은 프랑스 루브르 박물관에서 본 작품 <모나리자>가 준 감동보다 훨씬 큰 것이었다. 보면 볼수록, 알면 알수록 새로운 게 터키의 역사와 문화가 아닐까 한다. 하지만 세계의 역사는 이런 우수한 문화에 대해 별로 언급하지 않는다.
중국 또한 서양의 어떤 나라 못지 않게 찬란한 역사를 자랑하는 나라이다. 세계사가 아시아국을 중심으로 쓰여졌다면 중국은 분명 그 기준에 섰을 것이다. 거대한 땅덩어리만큼이나 긴 역사를 가진 나라이며, 사실 오랜 역사 동안 다른 아시아나라들에 큰 영향을 끼쳤다. 지금 런던에서 중국의 으뜸 문화재인 <진시황 병마용> 전시가 한창인데 이것은 세계 속에서 중국의 힘이 얼마나 커지고 있는지를 말해주는 것이기도 하다. 중국문화의 우수함에 대해 조명하기 시작한 것이다.
병마용갱(兵馬俑坑)은 중국 산시성 린퉁현에 있는 진시황릉에서 1km가량 떨어져 있는 유적지로 흙을 구워 만든 수많은 병사, 말 등의 모형이 있는 갱도로서 1974년 농민이 우물을 파다가 우연히 발견하였다. 진(秦)나라 왕 정은 난세의 춘추전국시대를 통일하고 최초의 황제로 등극, 시황제가 되었다. 이 사람이 바로 진시황(BC259-210)로, 그는 만리장성을 만들기도 했으며 도량형과 화폐를 통일하는 등 고대 중국의 발전을 이룩한 황제이다. 병마용갱은 바로 이런 시황제의 권력을 말해주는 것이다. 군사 8,000여 명과 말 500여필, 전차 130대가 열한 줄로 늘어서 있었던 병마용들의 모습은 마치 당장이라도 전쟁터로 나갈 듯한 위엄을 과시한다. 이는 황제가 죽은 후에도 친위대의 모습을 그대로 본뜬 도기 인형을 만들어 황제의 무덤 옆에 둠으로써 사후의 세계에서 또한 황제의 호위를 맡는 것을 의미한다. 그들의 손에는 무기가 들려 있으며, 키 175-195cm의 큰 체격의 병사들과 키 150cm, 몸길이 2m의 힘이 넘칠 듯한 말들이 이들의 자심감표현을 대신한다.
병마용은 진흙과 황토흙으로 구워 지하 5미터에 묻혀졌고 복장과 표정도 신분에 따라 달리 표현되었다. 8,000여명이나 되는 군사들의 얼굴이 너무나 생생히 표현되었기 때문에 더욱 이 얼굴들이 실제 진시황 호위대의 얼굴을 본 떴다는 주장에 힘을 싣는다. 장군의 묘역인3호갱의 군사들은 머리가 없는데 이는 장군들의 영혼이 그 테라코타 인형속에 스며들까하여 항우-중국 진(秦)나라 말기에 유방(劉邦)과 천하를 놓고 다툰 무장으로 진나라가 혼란에 빠지자 봉기하여 진나라군을 도처에서 무찌렀다. 진을 멸망시킨 뒤 서초 패왕이라 칭했으나 해하에서 유방에게 포위되어 자살했다-가 잘라 버렸다고 한다. 그들의 몸은 적색으로 다리는 청색, 양말은 흰색, 신은 검정색으로 채색이 되어있다.
무엇보다 놀라운 것은 이 군사들이 들고있는 쇠붙이 무기들이 2000년이 넘도록 썩지 않고 남아 있다는 사실이다. 고고학자들과 과학자들의 조사결과 화살촉과 칼 등에는 구리, 주석, 마그테슘, 니켈, 코발드와 같은 성분 13가지가 섞여 있어 무기들이 녹슬지 않게 제작되었다는 것이다.
지금까지 발견된 병마용들은 색이 바래져 처음 만들어 졌을 당시 채색이 되었었는지에 대해서 많은 의문을 갖는다. 많은 고고학자들은 채색이 되어졌을거라 추정하는데 문제는 가마에 들어가지 전 채색을 했는지, 아니면 굽고 난 후 되어졌는가 하는 것이다. 왜냐면 그 색들이 다 바래졌는것으로 보아 굽고 난 후 색을 입혔을 가능성이 높다는 것인데, 일반적으로 도자기나 접시 항아리 벽돌등의 요업제품은 가마에 굽기전에 채색을 하여 그 색이 바래지지 않기 때문이다. 어쨌든 채색된 부분이 일부 남아 있으므로 색을 입힌 것은 증명이 되었으나 어느정도 화려했으며 어떠 색들을 주로 썼는지에 대해서는 더 많은 조사가 필요하다.
중국사람들은 ‘대칭’을 중요하게 생각한다. 이로 봤을때 진시황 무덤의 동쪽에서 발견된 이 병마용갱 외에도 서쪽 어딘가에서도 발견됬을 있다는 추측이 많아. 만약에 그것이 발견된다면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유적지가 되지 않을까싶다. 아마 이번 <진시황 병마용> 전시를 보고나면 중국의 역사가 궁금해 질 것이고, 사실 역사의 찬란함은 세상 곳곳에 있다는 것을 실감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