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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 속에 한국화를 그려보자. 혹은 교과서나 화집에서 본 유명한 한국화를 상기시켜보자. 겸재 정선의 작품이 어떨까? 넓은 여백과 저 멀리 펼쳐진 산이 보일 것이다. ‘여백의 미(美)’라는 말이 새삼 다가온다. 이 말은 아무것도 그려지지 않은 공간을 화면 속에 남겨 두면서 거기서 오는 기운을 느끼는 것을 말하는 게 아닐까 한다
영국에서 만난 한 외국인 친구가 한국에 놀러 온 적이 있었다. 같이 배낭여행을 하면서 경주에 들렸는데 불국사 안을 걸으면서 ‘기(氣)’라는 것에 대해 설명해야 했다. 단어를 설명하는 것에 있어 그렇게 식은 땀이 나면서 말문이 열리지 않던 건 아마 처음이었을 것이다. 영어가 유창하지 않다거나 동양철학에 관한 지식이 짧아서라고 말할 순 없다. 우리끼리는 ‘기’라는 것에 대해 딱히 설명하지 않아도 안다. ‘기가 통한다.’라는 말처럼 아주 쉽게 뜻이 이해되기 때문이다. 오히려 설명을 하려고 한다면 정확한 의미가 전달되지 않을 것이다. 그때 결국 그 친구를 이해시키는 것을 포기 했어야 했다. 왜냐면 서양인에게 ‘기’라는 것은 어쩜 도저히 이해가 안 되는 것일 수 있기 때문이다.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이나 너무나 감성적인 것을 호소하기에는 그네들의 정신은 너무 이성적이기 때문이다. 물론 모든 부분에서 그렇다고 말할 순 없다- 어쩜 미완성인 듯하게 보이는 한국화의 여백과 무의식적으로 우리에게 배여 있는 ‘기’라는 개념, 이러한 것들이 한국적인 사고와 시각을 만드는 것이 아닐까 한다.
언젠가 한번 언급했었지만 한국은 산이 많다. 태백산맥이 길게 뻗어있고 거기서 이어지는 산들에 대한 자세한 설명이 없어도 그냥 한국의 풍경을 보기에도 산이 많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물론 전라도 지방이나 한반도 서쪽지방은 높은 산이 많지 않지만 낮은 산들을 비롯하여 그 수는 많다. 서울에서 출발하여 부산까지 이어지는 경부선을 타고 유리창 밖의 풍경을 구경하면 겹겹이 놓여져 있는 산들의 모습의 아름다움이 느껴진다. 겹쳐져 있는 산의 경계에서 느껴지는 기운을 아는가? 실제 산과 산 사이의 거리가 거리 가깝지 않으며 그 사이의 공간의 흐름과 공기의 움직임을 어림짐작할 수 있다. 그것이 기운이다. 어쩜 내가 그림을 그리는 사람이기에 그런 사소한 것에 더욱 민감할 수도 있다. 하지만 한국인이라면 어떤 서양인들보다 이것을 잘 이해할 것이라고 장담한다. 항상 산을 볼 수 있기 때문에 둔감해졌을 수 있으나 산에서 느껴지는 기운이 우리 한국인의 정서에 참으로 큰 영향을 미친다.
스코틀랜드나 웨일즈의 일부 지방을 제외하고는 영국에서 산을 보기는 힘들다. 갓 영국에 도착했을 때에는 적응하기에 바빠 한국과 뭔가 다르다는 것을 쉽게 알아 차릴 수 없었다. 하지만 아주 크게 다른 것 하나를 간파하는 데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는데 그것이 바로 산이 없다는 것이다. 어느 날 문뜩 오랜 시간의 흐름을 말해주는 큰 나무들과 넓은 하늘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영국은 뭔가 메말라 보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서야 땅 위에 놓여진 집들이나 나무, 혹은 강가 뒤로 펼쳐져 있어야 할 산이 어디론가 사라지고 없다는 것을 알아 챈 것이다. 어떤 한국인들은 산 속을 걸으면서 산과 대화도 한다는 데 그 간단한 것 하나 알아채는 데 어찌 그리 둔했나 모르겠다. 지금도 사실 한국과 달리 너무나 넓게 느껴지는 하늘을 이 곳 영국에서 볼 수 있어 행복하지만 한국에서처럼 푸르른 산을 볼 수 없다는 사실이 안타까울 때가 있다.
산이 없는 영국의 풍경은 여유 있고 평화로워 보인다. 물론 빌딩으로 가득 찬 런던 같은 대도시는 예외다- 길게 뻗어진 평지나 낮은 언덕 위의 집들과 자연의 모습은 시간을 잠시 멈춘 듯 한가로움이 느껴진다. 하지만 그곳에 빠져있는 것은 숨은 기운이다. 대부분의 이런 영국의 풍경 속에는 비밀스러움이 없다. 작은 집들이 몇 채 모여있고 그 집 앞에는 작은 개울이 흐르며 큰 산이 집 뒤에 위치한 한국 시골의 모습을 상상한다면 혹시 이 비밀스러움이 무엇인지 짐작할 수 있을지 모른다. 크고 높은 산 속에서 느껴지는 기운은 비밀스러움으로 변한다. 평지에 놓여진 것들은 우리의 손이 닿을 수 있을 것 같은 가능성을 가지게 해준다. 길을 따라 걷다가 보면 언젠가는 쉽게 도달할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높은 산을 다르다. 가고자 시도한다면 먼저 올라가야 한다는 것에 대한 압박과 정리된 길이나 도로를 걷는 게 아니라 먼저 지나간 사람들에 의해 자연스레 만들어진 흔적을 따라 걷는다는 것, 또한 걷는 동안 좌우에 보이는 것이라고는 빽빽한 나무들뿐이지 집처럼 사람의 손이 닿은 것은 어떤 것도 발견 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동화 속에서는 많은 등장인물들이 산 속에서 길을 잃고 돌아오지 않는 것이 아닐까? 비밀스럽다. 겹겹이 놓여진 산을 보면서 정기(精氣)같은 것을 느낄지언정 산 사이에 있을 도시나 마을을 상상하진 않는다. 또한 사람들이 등산을 하긴 해도 산을 보면서 사람들이 산 속 어딘가에서 걷고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이처럼 산은 속세(俗世)와 다른 공간이다. 그렇기 때문에 마을이나 도시와 함께 보이는 산은 비밀스럽고 한 눈에 보이지만 두 세상을 보는 듯한 철학적 사고를 하게 만든다.
겸재 정선의 작품을 다시 떠올려 보자. 이제 어떻게 그의 그림들이 그려졌는지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 먼저 넓은 화선지를 펼쳐 놓는다. 산이 중심이다. 집과 나무, 혹은 인물이 중심인 서양화와 달리 화면의 많은 부분에 산이 자리잡고 있고 산 주변의 여백은 산의 ‘기운’을 말하려 할 것이다. 그리고 집 같은 것들은 작거나 혹은 산과 멀리 떨어져 놓여져 있다. 속세와 산의 비밀스러움은 여백으로 단절되어 있고 그 여백 또한 우리에게 마음을 울리는 기운으로 다가온다.
이렇듯 한국화에서 나타나는 ‘보이지 않는 그 무엇’은 어쩜 동양적 사고뿐만 아니라 산이 많은 지형적 특성 때문인지도 모른다. 산이 없다는 것은 우리의 정신을 편안하게 만드는 중요하고 핵심적인 것을 상실했다는 것과 같다.
가끔씩 여기 영국의 생활 속에서 한국화를 그려보자. 넓은 하늘에 산을 그려 넣고, 이야기가 너무 많은 평지 위의 모습에서 필요 없는 것들을 삭제하고 여백으로 처리해버리는 것이다. 그러면 우리가 그리워하는 ‘기’의 흐름을 맛볼지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