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지혜의 예술칼럼 (29) 세계 미술시장의 눈이 중국으로 쏠리고 있다
미술시장의 변화
미술시장의 발전적 변화를 살펴보면, 소위 모더니즘 미술시장에서는 미술관급 대형 작가의 작품들이 상업적 갤러리(1차 미술시장)를 중심으로 주로 거래되었다. 그러나, 포스트모던 시기로 접어들면서 일명 ‘미술백화점’으로 불리는 아트페어(2차 미술시장)나, 소더비와 크리스티와 같은 경매회사(2차 미술시장)가 나타나 다양한 작품들로 소비자들의 구미를 당기고 있다.
포스트모던 미술시장의 주특징 중 하나는 ‘큰손’ 컬렉터의 등장이다. 이들은 영국의 젊은 아티스트(yba)를 표방하는 데미안 허스트나 미국현대미술을 대표하는 제프 쿤스뿐만 아니라, 일본현대미술의 대명사 무라카미 타카시, 중국현대미술의 1세대인 아이 웨이웨이를 급부상시키기에 이르렀다.
포스트모던 미술시장은 특히 아시아 현대미술에 주목했다. 즉, 21세기 국제미술계는 이전에 투자한 아시아 현대미술로 그야말로 대박행진을 이어가는 유럽과 미국의 큰손 컬렉터들의 전략적 투자에 의해, 1,2세대 중국현대미술과 인도, 베트남, 러시아현대미술을 중심으로 형성되고 있다.
아시아 미술시장 성장의 흑과 백
그런데, 왜 이렇게 아시아 미술에 특히 눈을 돌리는 것일까?
그 이유를 유럽과 미국이 현대미술을 장악하고 있어 서구 현대미술에 비해 상대적으로 아시아 현대미술이 국제미술계에서 제대로 평가받지 못했었다는 것에서 찾는 전문가들도 있다. 서양중심의 미술사에서 유럽과 미국이 세계현대미술을 자신들의 잣대로 평가했던 예는 실제로 쉽게 찾아 볼 수 있다.
아시아 현대미술을 바라보는 기준도 그 일례이다. 일본-팝(J-POP)이나 ‘냉소적 리얼리즘’과 ‘정치적 팝 아트’라고 표현되는 중국현대미술을 1960년대 미국 ‘팝 아트’의 연장선으로 간주하는 것이다. 결국 아시아미술에 대한 관심을 유럽과 미국 현대미술의 우위성을 강조하는 일부분으로 여기는 셈이다.
한편, 2차 미술시장을 중심으로 성장한 아시아미술의 급부상 요인을 수요, 공급이라는 경제적 측면에서 설명하는 전문가들도 있다. 예를 들어, 1970년대 말 ‘아이디어가 곧 아트’라는 슬로건으로 등장한 ‘개념미술(Concept Art)’은 매우 급진적이었기에, 기존컬렉터들들은 개념미술 작품보다는 이전 컬렉션 형태의 작품들을 여전히 선호했다.
따라서 수요와 공급을 담당하는 미술시장은 이 수요층을 위한 작품들을 작가들에게 요구했고, 결국 1980년대에 접어들면서 새로운 구상화들(이탈리아의 트랜스 아방가르드, 독일의 새로운 야수파, 프랑스의 새로운 형상, 미국의 새로운 이미지 등)이 등장해 날개돋힌 듯 팔렸다.
그러나, 새로운 구상화들은 미술시장의 요구에 의해 만들어진 급조된 미술사조라 여겨져 미술계에서는 1980년대의 이 현상에 대해 별로 심도있게 논의를 하지 않고 있다. 이와 마찬가지로, 자본주의 논리에 따라 이윤을 위한 투자가치에 의해 움직이는 유럽과 미국의 큰손들이 아시아 현대미술투자에 몰리는 현상도 일시적인 현상이라고 분석하기도 한다.
중국이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이유
방대하게 커지고 있는 아시아현대미술시장에 대한 관심와 비판을 뒤로 하고, 특히 중국현대미술이 거대한 성장 잠재력을 지닌 블루오션이라고 불리는데는 간과해서는 안되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많은 관심과 비판을 동시에 받으며 논란의 중심에 서서 국제미술계의 스포트라이트를 받고 있는 중국현대미술은 1970년대에서 1980년대까지만해도 정부의 강력한 통제아래 있어, 누구도 지금처럼 유럽과 미국을 비롯하여 전 세계의 미술 시장을 흔들어 놓을 것이라고 상상할 수 없었다. 당시 중국미술이 갖는 의미는 예술가의 정신적 측면의 지지 또는 경제상 상징적 의미에 지나지 않았었고, 미술품 시장의 평균 가격도 일반적으로 몇 백 달러를 넘지 못하는 수준이었다.
그러나 중국현대미술사를 결정짓는 전환점 역할을 한 역사상 아주 중요한 사건들이 일어났다. 바로 중국현대미술사의 암흑기라도 해도 과언이 아닌 문화혁명(1966~76)과 천안문 사태(1989)다.
특히, 문화혁명의 시기는 예술이 자라나기에 너무나 모질고 척박한 시대였다. 예술을 사회주의의 주요 무기로 간주한 중국정부에 의해 사회주의적 사실주의만을 강조했다. 정치적 반대파를 숙청하는 과정에서 순수 예술을 추구하는 예술가들조차 탄압했고, 수많은 예술가들이 단지 지식을 가졌다는 이유만으로 추방되거나 강제노동에 시달리는 등 심지어 예술활동 자체를 금지당하기도 했다.
1985년부터 1989년까지는 중국 전역에 걸쳐 ‘85년 신조미술운동’이 일어났고, 1989년에 이 85 신조의 면모를 여실히 드러낸 전시회가 열렸었다. 이것이 바로 중국현대미술사상 가장 중요하다고 평가되는 중국미술관의 “중국현대예술전”이다.
‘유턴금지’라는 크고 빨간 표식이 강렬했던 이 미술전 포스터는 돌아가지 않아야하는 중국의 역사와 미래에 관한 메세지였다. 이는 중국정부의 예술가 탄압을 불러오기도 했지만, 중국미술가들은 이에 굴하지 않고 예술작품을 통해 창작의 표현과 자유를 표현했다.
“중국현대예술전” 포스터 ‘유턴금지’
이런 문화혁명의 혹독한 시기를 거치며 억압적 체제에 대한 반항심을 키워온 세대가 주역이 되어 1989년 천안문 사태가 일어났다. 대부분의 중국 현대미술 작가들이 바로 이 세대에 속한다. 중국 현대미술이 세계의 주목을 받기 시작한 것도 이 천안문 사태 이후부터다.
당시 중국 공산당에 저항했던 작가들이 외국으로 망명해 활동하면서 해외에 알려지기 시작했는데 천안문 사태를 전후해 외국으로 나간 해외파와, 국내에 남아서 사회·정치적 메시지를 담은 작업을 계속한 작가들을 합쳐서 ‘차이나 아방가르드’ 작가라 부른다.
수많은 외신들이 1985년 “중국현대예술전”에 소개된 작품들에도 열광했었다. 하지만, 중국의 현대미술, 그 중에서도 서구적 형식을 갖춘 아방가르드 형식의 미술에 세계가 제대로 집중하기 시작한 것은 1990년대부터라 할 수 있다.
정치적 팝아트의 선구자 왕광이
펑쩡지에, 자화상 H 시리즈 no.2, 2009
아이 웨이웨이, 원근법 프로젝트- 파괴와 창조의 미학
위에민쥔, 처형, 1995
천안문 사태후, 개혁과 개방으로 눈부신 경제성장을 이루지만 여전히 정치와 사상의 자유가 없었던 모순된 현실 속에서 중국 현대미술 작가들은 자신들의 정치적 무력감을 냉소와 허무, 정치적 풍자로 표현해냈다. 여기서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전혀 느낄 수 없는 사회주의적 냉소적 사실주의 화풍, 즉 이질적인 느낌의 중국 현대미술이 나타난 것이다.
정치적 팝아트로 비판적 칼날을 승화시키는 등, 중국 특유의 사회적 조소, 정치적 풍자가 숨어있는 아방가르드 미술 형식은 끊임없이 새로움을 추구하는 서양 문화인들에게 신선한 충격같은 것을 주었다.
1993년 처음으로 국제비엔날레에 참가하면서, 중국 현대 미술가들은 국제무대로 진출하였고, 서양미술가들과 합작 전시회도 개최하였다. 이때부터 국제적인 수집가들은 본격적으로 중국미술품을 사들이기 시작했으나, 그 숫자가 많지 않아 중국미술 시장에 큰 영향을 미치지는 못했다.
그러나, 세계 패권과 미술 시장의 번영 관계가 늘 서로 상관관계를 보여주고 있듯이, 중국은 자신들의 성장하는 경제력으로 글로벌 미술시장에 큰 돈을 쏟아부었고, 앞으로도 지속적으로 투자를 이어나갈 전망이다. 그래서 현재는 미술시장 점유률이 미국, 영국에 이어 세계 3위이지만, 곧 1위를 차지할 것 같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분석이다.
한 서양화가, 중국과 사랑에 빠지다 (4-4편)
(다음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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