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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그러자 모든 사람이 돌로 치니라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간음 중에 잡힌 여자를 끌고 와서 가운데 세우고 예수께 말하되 선생이여 이 여자가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혔나이다 모세는 율법에 이러한 여자를 돌로 치라 명하였거니와 선생은 어떻게 말하겠나이까 저희가 이렇게 말함은 고소할 조건을 얻고자 하여 예수를 시험함이어라 예수께서 몸을 굽히사 손가락으로 땅에 쓰시니 저희가 묻기를 마지 아니하는지라. 이에 일어나 가라사대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하시고 다시 몸을 굽히사 손가락으로 땅에 쓰시니 저희가 이 말씀을 듣고 양심의 가책을 받아 어른으로 시작하여 젊은이까지 하나씩 하나씩 나가고 오직 예수와 그 가운데 섰는 여자만 남았더라 [요한 복음 8장 3~12절]
지금부터 거의 2000년 전 이야기다. 정확히 1970년 전쯤 될 것이다. 당시 예수의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는 말에 간음한 여자를 죽이려던 사람들이 다 그 자리를 떠났다.
우리 시대 이야기를 들어보자.
‘죄 없는 자가 돌로 치라.’는 말이 떨어지기도 전에 돌멩이가 우박처럼 쏟아지더니 돌무덤이 순식간에 쌓이게 되었다.
이들이 자리를 뜨지 않고 돌멩이를 같이 던진 것은 죄가 없어서가 아니요, 자리를 뜨는 순간 자신의 죄를 만인 앞에 인정하게 되는 것을 두려워한 까닭이다.
양심에 털 났다라는 말이 있다. 심장의 형태에 대해 동의보감에서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심장의 형태는 피어나지 않은 연꽃 같고, 가운데 9개의 구멍이 있는데, 이곳이 천지의 기를 이끌어 가서 정신이 깃들어 있는 곳이다.
’지식이 많은 사람은 심장에 구멍이 7개 있고, 털이 3개 있다. 지식이 보통인 사람은 심장에 구멍이 5개 있고 털이 2개 있다. 지식이 낮은 사람은 심장에 구멍이 3개 있고 털이 1개 있다. 보통사람은 심장에 구멍이 2개 있고 털이 없다. 우둔한 사람은 심장에 구멍이 1개 있다. 몹시 우둔한 사람은 심장에 구멍이 1개 있는데, 그나마도 몹시 작다. 구멍이 없는 것은 정신이 드나드는 문이 없는 것이다.’-난경.
지식이 많은 사람이 털도 많다는 의미인데 어쩌다 털 많이 난 것이 사회 통념상 뻔뻔한 인물로 변천되었는지 자못 궁금하다.
결국 지식이 많다는 것은 세상사는 요령이 발달해 있다는 것이 아닌가.
지식과 지혜는 별개의 것으로 구분해왔던 우리네 습관이 양심에 털 난 것을 부정직한 것으로 변형시킨 동인으로 해석될만하다.
21세기 우리가 사는 지금을 정보사회라 칭한다.
정보란 지식이지 지혜가 아니다. 우리시대의 정보란 거의가 돈과 관련된 것으로 정보를 싸고 도는 거짓과 참의 싸움이 결국 ‘술 권하는 사회’에서 일절 진보하지 못하고 결국 진리와는 별개의 삶을 강요하게 되는 것이다.
양심에 털이 아니라 구멍이 나야 한다. 정신이 드나드는 문이 없음으로 우둔함을 벗어날 수 없고 그 우둔함이 사회적 해악으로 드러날 때가 종종 있다.
정신 없는 군상들의 행위로 인해 스스로 자유를 박탈시키는 ‘빅브러더’ 사회를 도입해야 하는 어처구니 없는 상황을 목격하고 있는 것이다.
유가(儒家)는 목적 추구의 의식적 행위인 유위(有爲)를 제창하였으나, 도가는 이를 인간의 후천적인 위선(僞善) •미망(迷妄)이라 하여 이를 부정하는 무위를 제창하였듯 정보화의 홍수 속에서 떠밀려가는 우리들의 자화상을 돌이켜 볼 시간이 필요하다.
2000년 전 우리네 선조들은 그래도 양심에 털이라도 있었으나 우리 시대는 그 털마저 면도기로 밀어버린 뻔뻔스러움으로 한 시대를 호령하고 있는 것이다. <한인신문 편집장 박운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