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스트리아의 피아니스트 파울 비트겐슈타인은 앞길이 창창한 음악가였다. 하지만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군에 징집되어 전선에 투입되었다가 그만 부상을 입어 오른팔을 잃어버리고 만다. 이제 그에게 피아니스트로서의 희망은 사라지는듯했다. 하지만 그는 좌절하지 않고 남은 왼손만으로 피나는 연습을 하기 시작한다. 스승이었던 요제프 라보도 안타까운 제자를 위해 왼손을 위한 연습곡을 만들어 주며 격려했다. 그 후 피나는 노력 끝에 왼손테크닉을 연마한 비트겐슈타인은 당시의 저명한 작곡가들인 브리튼, 힌데미트, 프로코피에프, 리하르트 슈트라우스 등에게 왼손을 위한 피아노협주곡을 의뢰하지만 모두 자신이 없다는 이유로 사양하고 만다. 하지만 프랑스 작곡가 모리스 라벨은 흔쾌히 승낙하여 그를 위해 협주곡을 작곡해 주었다. 그로부터 2년 후인 1931년 11월 27일, 비트겐슈타인은 빈에서 빈 교향악단과의 협연으로 이 곡을 연주했고 청중들은 큰 감명을 받았다. 이 라벨의 ‘왼손을 위한 피아노 협주곡’(Concerto pour la main gauche)은 지금도 많은 피아니스트들의 왼손 기량을 과시하기 위해 연주되곤 한다.
지성에 의한 형식미
드뷔시와 더불어 대표적인 인상파 작곡가로 알려져 있는 모리스 라벨(Maurice Joseph Ravel, 1875-1937)은 프랑스와 스페인 국경지대인 바스크 지방, 시부르(Ciboure)에서 출생하여 파리로 이주, 파리 음악원에서 수학하였다. 드뷔시가 감정에 치우져 작곡한 스타일이라면 라벨은 지성에 의해 감정을 억제하면서 명확한 형식을 갖추며 고전적인 형식을 활용하여 작곡한 스타일이었다. 그의 음악은 치밀한 계산하에 정교하게 쓰여졌는데 이를 두고 독설가로 유명한 작곡가 스트라빈스키는 그를 가리켜 ‘스위스의 시계공’이라고 비웃기도 하였다. 사실 라벨의 아버지는 스위스 혈통이었기 때문에 이를 빗대어 한 말이기도 했다. 이 말은 들은 라벨의 응수가 걸작이다. “그래 나는 시계공이다. 시계공이 심심풀이로 만드는 음악이 밤낮으로 오선지만 붙잡고 앉아 있는 당신들 음악보다 나은 것은 어떻게 생각하나?”
라벨은 ‘관현악의 마술사’라는 별명이 붙을 만큼 당대 그의 관현악곡 작법은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우리에게 널리 알려진 관현악곡 <볼레로>를 보면 그 당시로써는 매우 새로운 관현악법이었다. 라벨이 1928년 미국여행을 다녀온 후 작곡한 곡으로 시작부터 끝까지 반복되는 리듬주제와 스페인과 아라비아 민속풍이 어울러진 듯한 멜로디는 악기만 바뀔 뿐 계속 반복된다. 그리고 처음에는 아주 작게 시작해 점점 커지는 방법을 사용했다. 이 곡은 발표된 후 엄청난 인기를 얻어 당시 프랑스에 볼레로 열풍이 불었다고 한다. 또 라벨이 오케스트라용으로 편곡한 무소르그스키의 피아노곡 <전람회의 그림>은 원곡보다 더 큰 사랑을 받으며 자주 연주된다.
라벨은 150Cm의 단신이었지만 세련되고 귀족적인 감각을 폼 내던 타고난 멋쟁이로 일생을 독신으로 살았다. 또한 그는 미식가였고 각국의 골동품을 모으는 귀족적 취미의 소유자였다. 그의 나이 57세 때인 1932년, 뜻하지 않은 자동차 사고로 뇌를 다친 라벨은 이것이 점점 악화되어 정상적인 생활을 하지 못하는 상황까지 가게 되고 결국 1937년 뇌수술까지 받았으나 그 해 12월 28일 62세의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파리에서 한 시간가량 떨어진 도시 몽포르 라모리(Montfort l'Amaury)에는 라벨이 그의 생의 마지막 16년을 살았던 저택 Le Belvédère가 있으며 1997년에 이 저택은 국립 박물관으로 지정되어 일반에게 공개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