랑부이에 성 <Chateau de Rambouillet>
<랑부이에 성 전경>
지난 6월 8일 독일 가르미슈 파르텐키르헨에 있는 엘마우 성(Schloss Elmau)에서 41회 주요 8개국(G8) 정상회의가 열렸다.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는 독일 나치 정권의 과오를 반성하는 의미로 당시 독일군의 휴양지로 이용되던 고성을 택했다고 전하여 G8 정상회의 장소의 상징성을 다시 한 번 세계에 알렸다.
세계 주요국 정상들이 모여 세계경제, 정치, 외교에 대한 폭넓은 논의를 이어가는 G8 정상회의. 그 유례는 지난 1975년 두 번의 석유 위기에 놀라 긴급 소집한 미국, 영국,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 일본 등 6개국 정상회담(G6)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리고 그 역사적인 첫 번째 G6 정상회담이 개최된 곳이 바로 오늘 이야기할 랑부이에 성이다.
파리에서 55km 남서부에 위치한 랑부이에 성은 프랑스의 황제 나폴레옹 1세가 오스트리아의 황녀 마리 루이즈에게 청혼한 곳이며 오늘날까지 프랑스 대통령의 공식 여름 휴양지로 사용되고 있는 특별한 장소이다.
베르사유보다 작고 쉬농소 성보다 소박한 랑부이에 성이 이토록 오랜 시간 프랑스 최고 권력자들의 사랑을 받을 수 있는 비결이 무엇일까? 막상 랑부이에 성을 찾아보면 그 명성에 비해 소박한 외양에 실망할 수 있다. 이것이 랑부이에 성이 한국에 잘 알려지지 않은 이유가 될 수 있기도 하겠다. 그러나 랑부이에의 매력은 바로 그 소박함에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붉은 벽돌과 담쟁이 넝쿨로 뒤덮여 있는 외관은 유럽 어느 성보다 자연과 잘 어우러진 아름다움을 자아내며 르네상스 양식으로 치장된 성의 내부와 프랑스식과 영국식이 자연스럽게 어우러진 정원은 랑부이에를 찾는 사람들로 하여금 소박함 속의 깊이 있는 아름다움을 느끼게 해 준다.
또한 랑부이에 성을 특별히 아끼고 생각했던 루이 16세, 나폴레옹 1세의 삶과 사랑에 대한 이야기는 이 곳을 더욱 로맨틱한 장소로 만들어 준다. 부르봉 가문의 선조들과 마찬가지로 사냥을 유달리 좋아한 루이 16세는 거금을 주고 이 곳을 구입하여 마리 앙뚜와네트 왕비의 마음을 잡기 위하여 안간힘을 쓰는데 베르사이유 궁전의 정원에 아담하게 만든 쁘띠 트리아농 (Petit Trianon)을 본떠서 만든 유착소(Laiterie)가 그 중 하나이다. 루이 16세 부부의 이야기를 상상하며 랑부이에를 둘러보면 한창 더 재미있는 여행이 될 수 있겠다.
<유착소>
나폴레옹 1세는 랑부이에 성을 황실의 거주지로 정할 때 아주 오랜 시간을 망설였으나 결국 랑부이에의 아름다움에 반해 여러
단계의 공사를 진두지휘하였고 황녀 마리 루이즈와 함께 정착하려 노력한다. 그러나 그렇게 애착을 두었던
랑부이에는 결국 역사 속에 나폴레옹의 비참한 말년의 장소로 기록되는데 워털루 전쟁에서 패하고 황제 포기각서에 사인을 한 곳도 이 곳이고 영국으로
망명길을 떠나기 전 마지막 하룻밤을 쓸쓸히 보낸 곳도 랑부이에 성이다.
역 사
랑부이에 성은 숲 속에 묻힌 단순한 목장을 1368년에 샤를르 5세 (Charles V)의 왕실 숲 감독관이자 파리 시의 시장이던 쟝 베르니에 (Jean Bernier)가 구입하여 당시에 유행하던 ‘해자’를 설치하면서 요새의 역할을 지니게 된다. 100년 전쟁의 격동기인 1425년 6월 살리스버리 (Salisbury) 공작이 점령하였었고 1427년과 1428년에는 영국군이 점령한다.
15세기 후반에 쟝 당젠느 (Jean d`Angennes)의 소유로 되돌아오고, 1612년 루이 13세의 총애를 받던 샤를르 당젠느 (Charles d`Angennes)가 주인이 되지만 몇 년 후에는 이 가문의 소유를 벗어나서 1699년 재무장관을 지내던 플뢰리오 다흐므농빌 (Fleuriau d`Armenonville)이 새로운 주인이 된다.
그는 이 지역을 근대화시키고 성과 정원을 아름답게 꾸미지만, 6년 후에 루이 14세의 강한 압력에 의하여 루이 14세와 몽테스팡 (Montespan) 부인의 아들인 뚤루즈 (Toulouse) 백작에게 소유권을 넘긴다.
1737년 12세의 나이에 이 성을 유산으로 물려받은 뻥띠에브르 (Penthievre) 공작은 이 곳을 아름답게 꾸미는데 투자를 아끼지 않았고 종 형제간인 루이 15세는 이 곳을 아주 좋아하여 자주 들렀다고 전해진다.
뻥티에브르 공작은 당시 프랑스에서 가장 부자인 동시에 인심이 후하여 국민들에게 사랑을 받았으며 프랑스 대혁명의 격동기에 거의 유일하게 혁명군들로부터 보호를 받은 귀족이었다.
<로마 왕의 궁전>
랑부이에성은 프랑스 대혁명의
격변기 동안에 다행스럽게도 파괴되는 것을 피하게 되는데 1804년 5월 1일로써 황제로 등극한 나폴레옹 1세가 11월 4일 처음으로 이 곳을 방문하고 오랜 망설임 끝에 거처로 이용하기로
결정하고 보수공사를 지시한다. 이 곳을 매우 사랑했던 나폴레옹 1세는
매년 정기적으로 이 곳에서 생활을 하였고 바로 이곳에서 1810년 2월 23일 오스트리아의 황제에게 서신을 보내어 황녀인 마리 루이즈 (Marie-Louise)에게
청혼을 한다.
1811년에 나폴레옹 1세와 마리 루이즈 사이에서 로마의 왕으로 불리는 아들 애글롱 (Aiglon)이 태어나고 1812년 아들에게 주기 위하여 로마 왕의 궁전 (Le Palais du Roi de Rome)을 건설하도록 지시하지만 1814년 3월 말부터 나폴레옹 1세가 유배를 가면서 공사가 중단된다.
1815년 ‘백일 천하’ 이후에 워털루 (Waterloo) 전투에서 패하고 생 엘렌느 (Sainte-Helene)로 유배 가기 전날인 1815년 나폴레옹 1세는 6월 29일 밤을 마지막으로 이곳에서 쓸쓸히 보내고는 호쉬포흐 (Rochefort)에서 유배지로 출발하며 랑부이에 성과 영원히 이별한다.
이후 왕정복고가 되면서 루이 18세가 1818년 7월 29일에 이곳에서 처음으로 사냥을 즐기고, 그의 동생인 샤를르 10세는 자주 이곳에 묵으면서 사냥을 하였다. 루이 16세의 동생으로 왕위에 오른 샤를르 10세도 그후 이 성에서 왕위
포기각서에 사인을 하고는 마지막 밤을 지내고 망명길에 오른다. 1852년에 쿠데타로 황제에 오른 나폴레옹 3세에 의하여 성은 시민들의 공공자산으로 선포되었으며 1883년부터
프랑스 공화국 대통령의 접대소로 이용되다가 1886년 2월 23일부터 대통령의 공식 여름 휴가장소로 지정된다.
나폴레옹 1세의 목욕실 (Salle de bains de Napoleon 1er)
성에서 가장 유명한 장소로서 나폴레옹 1세의 역사적인 장소들을 폼페이 양식으로 고다르 (Godard)가 1809년에 장식한 것이다.
왕비의 유착소 (La laiterie de la Reine)
이 성을 싫어하는 왕비 마리 앙뚜와네트의 관심을 끌고자 루이 16세가 건축가 때브냉 (Thevenin) 에게 명하여 만든 곳으로 중앙에는 신고전주의 양식으로 지어진 유착소가 있고 좌우 양쪽으로는 시골 풍의 벽돌로 지은 건물이 들어서 있다.
<유착소 내부 요정의 상>
유착소 내부에는 인공 동굴과
분수대가 설치된 장방형의 방이 있고 인공 동굴에는 삐에르 쥴리앙 (Pierre Julien)이 조각한
요정이 염소 등에 타고 있는 작품이 있다.
조개껍질로 장식된 초가 (La Chaumière aux Coquillages)
유착소 맞은편의 영국식 정원 한 가운데에 위치한 소박한 초가집의 내부에는 뻥띠에브르 공작이 며느리인 람발 공주 (La Princesse de Lamballe)를 위하여 건축가 구피 (Goupy)에게 의뢰한, 세계에서 유일하게 조가비로 만든 아주 화려한 방이 있다.
<초가 전경>
가장 가까운 항구 도시인 디에쁘 (Dieppe)에서 채취한 조개 껍질과 노정 쉬흐 센느 (Nogent-sur-Seine)에서 채취한 홍합 껍질과 흑백색의 대리석으로 장식을 하였는데 직접 보지 않고는 얼마나 화려한 지를 느끼기 어렵다.
<초가 내부의 조가비 장식>
국립 목장
랑부이에 숲의 한 가운데에 루이 16세의 명령으로 1785년에 세워진 프랑스 최초의 국립 목장이 있다. 해상권을 영국이 장악한 시절에 영국 상인들에게 의존하여 구입하던 양털을 더 이상 영국에 의존하지 않고 독자적인 생산을 하기 위하여 건립되었다.
1783년 종 형제 간인 뻥띠에브르 공작에게서 랑부이에 성을 사들인 루이 16세는 상품의 양털을 생산하기로 유명한 매리노 (Merinos) 종자를 또다른 종 형제간인 스페인 왕 샤를르 3세 (Charles III)로부터 1786년 구입하여 이 곳 국립 목장에서 자체적으로 번식 육성하였다고 전해진다. 매리노 종자는 양질의 털 때문에 1차 세계대전 전까지 꾸준히 프랑스 전역에 보급되었고 세계적으로 선호되는 종자가 되는데 새로운 우성 종자를 개발하기 위하여 종간 교배가 실험되고 스위스산 소, 북아프리카 산 양, 앙고라 산 염소 등을 수입하여 개량실험을 계속한다.
지금도 150 여 마리의 매리노 종의 양과 380 여 마리의 양떼, 88 마리의 소, 2,000 여 마리의 닭, 70 여 마리의 토끼를 사육한다. 연간 약 40 만 리터의 우유를 생산하는 국립 목장은 매년 6 만 명의 방문객이 찾는 곳이기도 하다.
<국립 목장>
안완기 : 프랑스 테마여행, '알고가자' 대표
이메일: algogaza82@gmail.com
홈페이지: www.algogaz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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